[카토커]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자이언츠맨, 가장 완벽했던 야구 선수 윌리 메이스가 세상을 떠났다

[카토커]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자이언츠맨, 가장 완벽했던 야구 선수 윌리 메이스가 세상을 떠났다

맛돌이김선생 0 60

샌프란시스코의 전설 윌리 메이스(왼쪽)가 200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대자’ 배리 본즈와 나란히 서서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윌리 메이스가 2015년 백악관에서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대통령자유훈장을 수여 받으며 모자를 벗어 인사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자이언츠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선수, 누군가는 베이브 루스보다도 낫다고 했던 야구계의 거인 윌리 메이스가 19일(한국시간)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세.

메이스의 아들 마이클 메이스는 샌프란시스코 구단 성명을 통해 “아버지는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변함없이 사랑을 보내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이날 밝혔다. 롭 만프레드 메이저리그(MLB) 커미셔너는 “오늘 MLB 야구 전체가 애도하고 있다”고 그를 추모했다.

최고의 타자였고, 최고의 주자였으며, 최고의 중견수였다. 니그로리그 1시즌을 포함해 메이스는 통산 23시즌 동안 3293안타에 660홈런을 때렸다. 통산 최다 홈런 6위, 최다 안타 12위의 강타자였다. 42세 되던 해까지 현역으로 그라운드를 누비며 통산 타율 0.301, 출루율 0.384, 장타율 0.557로 OPS 0.941을 기록했다. 마지막 2년을 제외하고 평생을 자이언츠맨으로 살았고, 샌프란시스코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선수는 언제나 그였다. 1966년 512호 홈런으로 내셔널리그 기록을 갈아치운 메이스는 환호하는 홈 팬들 앞에서 “나는 언제나 샌프란시스코의 일부이며, 샌프란시스코는 언제나 나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했다.

메이스는 천재였다. 불과 17세였던 1948년 니그로리그에서 이미 두각을 드러냈다. MLB 여러 구단이 진작부터 그의 재능을 탐냈지만, 빅리그 입성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인종차별이 엄연했던 시대환경 탓이다. 메이스는 1950년 뉴욕 자이언츠(현 샌프란시스코)와 계약했다. MLB 첫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의 데뷔 후 3년 만이었다.

메이스는 1951년 전설적인 좌완 투수 워렌 스판에게 홈런을 때려내며 MLB 첫 안타를 기록했다. 타율 0.274에 20홈런으로 그해 내셔널리그 신인왕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커리어는 이제 시작이었다. 범접할 수 없는 기록을 쌓아 올렸고, 그라운드 위에서 플레이는 누구보다 화려했다.

샌프란시스코의 후안 마리샬과 밀워키 브레이브스(현 애틀랜타)의 워렌 스판, 두 명예의전당 투수가 16이닝씩을 던졌던 전설적인 1963년 7월 2일 경기를 끝낸 주인공이 메이스였다. 0-0으로 맞이한 연장 16회말, 메이스가 스판을 상대로 끝내기 홈런을 터뜨리면서 MLB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투수전이 마무리됐다.

1954년 월드시리즈 1차전의 주인공도 메이스였다. 2-2 동점이던 8회초, 메이스는 광활한 폴로그라운드 외야를 헤치고 달려 나가 결정적인 타구를 어깨 너머로 잡아냈다. 당연히 중견수 키를 넘길 것으로 생각했던 클리블랜드 주자들이 모두 얼어붙었다. 자이언츠는 1차전을 이겼고, 월드시리즈를 제패했다. 통산 660홈런의 강타자 메이스가 남긴 최고의 순간이 바로 그 수비, 말 그대로 ‘더 캐치(The Catch)’였다.

1951년, 현역 시절의 윌리 메이스(오른쪽). 게티이미지


윌리 메이스가 1954년 월드시리즈 1차전, 클리블랜드 빅 워츠의 큰 타구를 뒤돌아 달려가 잡아내고 있다. ‘더 캐치’로 불리는 명장면. 위키피디아

메이스는 꾸준한 타자였다. 1954년 41홈런부터 1968년 23홈런까지 15시즌 연속 20홈런을 때렸다. 24세 되던 1955시즌 51홈런을 때렸고, 10년 뒤인 1965년 52홈런으로 다시 50홈런 이상을 기록했다. 당시까지 최다 기록이었던 베이브 루스의 통산 714홈런을 뛰어넘을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지만 구장 환경이 불리했다. 뉴욕 자이언츠 시절 중앙 펜스까지 147m, 초현실적으로 넓었던 폴로그라운드를 홈으로 썼다. 샌프란시스코로 연고지 이전 후 홈구장인 캔들스틱파크는 좌익수 방향의 강한 바람으로 악명 높았다. 메이스 같은 우타자가 홈런을 치기가 너무 어려웠다. 훗날 그가 대부가 되어 멘토 역할을 했던 샌프란시스코의 또 다른 전설 배리 본즈가 오러클파크의 맞바람과 싸워야 했던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메이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원정에서는 당겨치고, 홈에서는 밀어치면 된다. 캔들스틱에서 홈런을 많이 놓치긴 했지만 아무 문제 없었다. 홈런을 치는 것보다 이기는 게 더 중요했다”고 말했다.

메이스가 활약하던 시기 MLB는 황금기를 달렸다. 뉴욕 양키스의 미키 맨틀,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의 듀크 스나이더, 그리고 뉴욕 자이언츠의 메이스까지 1950년대 MLB는 뉴욕의 세 중견수의 시대로 불렸다. 맨틀도 스나이더도 위대한 선수들이었지만 오늘날 메이스의 위상은 이들보다 앞선다. 660홈런의 강타자가 누구보다 화려한 수비를 했고, 통산 339도루를 성공할 만큼 발도 빨랐다. 야수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의 극한을 보여줬던 이가 현역 시절 메이스였다. 종합적인 능력치를 따지면 ‘홈런왕’ 루스보다도 메이스가 낫다는 평가가 그래서 나왔다. 보는 사람마다 큰 소리로 ‘헤이’ 하며 인사한다고 해서 ‘세이 헤이 키드(Say Hey Kid)’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성격까지 쾌활했다.

메이스는 구단이 자금난에 빠진 1972년 5월 현금 포함 트레이드로 뉴욕 메츠로 이적했다. 1973년까지 뛰었고, 42세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1979년 94.7%, 당시까지 역대 최고 득표율로 명예의전당에 입성했다. 헌액 직후 열린 회견에서 메이스는 ‘당신이 본 최고의 선수를 꼽아달라’는 질문을 받았다. 메이스는 당당하게 답했다. “그건 나인 것 같다.”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는 명답이었다.

현역 시절의 윌리 메이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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