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토커]'아재 스포츠'에서 'Z세대 스포츠' 된 프로야구

[카토커]'아재 스포츠'에서 'Z세대 스포츠' 된 프로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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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24 프로야구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의 경기에서 관중들이 응원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부산 사직야구장 마운드에 인기 아이돌그룹 '에스파' 멤버 카리나가 등장한 6월 9일은 KBO리그 마케팅 역사에 오랫동안 상징적 장면으로 기억될 만하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이돌과 최고의 인기스포츠가 만난 이날, 사직은 거대한 아이돌 공연장이자 행사장이며 '핫플레이스'였다. 흐리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씨와 더블헤더 2차전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경기장은 2만2758석 매진을 기록했다. 카리나가 롯데 유니폼을 입고 시구할 때 중계방송 순간시청률은 15.5%(경기 평균 1.2%)까지 치솟았다.

동시에 이날 사직은 거대한 오프라인 광고판이자 팝업스토어였다. 롯데는 경기 전 입장 관중 전원에게 카리나가 모델을 하고 있는 계열사 맥주 '크러시'와 컬래버한 바다유니폼을 증정했다. 바다색 유니폼을 입은 만원 관중이 먹고 마시며 큰소리로 응원을 펼친 3시간이 그 자체로 생생한 광고가 된 셈이다.

여성·20대 야구팬 급증이 의미하는 것

카리나가 등판한 경기만 이런 게 아니다. 서울에 사는 LG팬 박지수씨는 요즘 야구 경기를 예매할 때마다 아이돌 팬들과 동질감을 느낀다. 박씨는 "요즘 야구장 표 구하는 게 콘서트 예매만큼 어렵다"면서 "클릭전쟁은 기본이고 오픈런도 해야 한다. 인기 아이돌이 참가하는 행사나 한창 뜨는 핫플레이스, 팝업스토어에서 겪는 일을 야구장에서도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 시즌 KBO리그는 역대 최고의 호황을 누리는 중이다. 지난 6월 15일 시즌 절반이 되기도 전에 500만 관중을 돌파했고, 관중동원 1위 LG부터 10위 NC까지 모든 구단이 평균 1만명 이상의 관중을 동원하고 있다. 리그 흥행을 선도하는 팀 한화 이글스의 평균관중은 1만1568명으로 좌석 점유율이 96.4%(매진 1만2000석)에 달한다. 한화 팬 황서희씨는 "대전 홈경기에선 1루 응원석에 앉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수도권 경기도 3루 쪽 좌석은 구하기 어렵다"면서 "티케팅하러 접속하면 일찍 들어가도 이미 좋은 좌석은 다 나간 뒤다. 1시간 동안 클릭해야 겨우 내야 좌석을 구한다. 클릭을 하도 많이 해서 예매 사이트가 '비정상적인 접속'으로 인식하고 창이 닫히는 일도 있다"고 했다.

'오픈런'도 필수다. 류현진의 시범경기 첫 등판을 앞둔 지난 3월 12일, 대전야구장은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팬들이 새벽부터 찾아와 줄을 섰다. 류현진의 어센틱 유니폼은 초도 물량 200장이 하루 만에 동났다. 황씨는 "한정판 굿즈는 경기 2시간 전에는 입장해야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모 구단 마케팅팀 관계자는 "SSG의 스타벅스 유니폼, 두산의 '망그러진곰' 컬래버 상품처럼 팬들이 매력적으로 느끼는 상품은 출시하자마자 바로 다 팔려나간다"고 했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위기론을 넘어 종말론적 분위기까지 감돌았던 한국야구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한 2020년 KBO리그 총 관중 수는 32만8000여명에 불과했다. 제한적 입장이 허용된 2021년 총 관중은 133만명 수준에 그쳤다. 2022년 600만 관중을 동원했지만, 코로나19 직전 5년(평균 789만명)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이었다. 여기에 2023시즌을 앞두고 열린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의 참패는 정규시즌 흥행에 치명타가 될 것처럼 보였다. 당시 한 구단 마케팅 담당자는 "올해 야구 흥행은 틀렸다"면서 절망적인 반응을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비관적 예상과 달리 지난해 KBO리그는 약 810만 관중(역대 3위)을 동원해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회복했고, 올해는 역대 가장 빠른 속도로 1000만 관중에 다가가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코로나19 보상심리'에서 이유를 찾는 시각이 우세했지만, 올 시즌 관중 폭발은 그것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한 지방구단 마케팅 담당자는 "과거 야구장은 중장년층과 남성, 이른바 '아재'들이 주를 이뤘다면, 최근 흥행은 Z세대와 여성들이 주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NC 다이노스 구단의 자료를 보면 지난해 창원NC파크 홈경기 예매관중의 49%가 여성이었고, 올해도 48%가 여성으로 남녀 성비가 50 대 50에 가깝다. 연령대도 20대가 지난해 29.8%, 올해 32.3%로 가장 많다. 또 다른 지방구단 관계자는 "우리 구단 자체 집계 결과도 여성 비율이 49%다. 대부분의 구단이 대동소이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이뤄진 한 조사에선 두산 베어스 20대 팬 비율이 절반에 가까운 45.8%로 나오기도 했다. 작년 SSG 랜더스 홈구장에 방문한 20~30대 여성 팬이 2022년 대비 34.2% 증가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KBO 한 관계자는 "작년 올스타전 당시 현장 관중은 여성이 6 대 4 정도로 남성보다 훨씬 많았다"고 했다. 수도권 구단 관계자는 "남성 고객은 혼자 야구장에 오는 경우도 있지만, 여성 고객들은 대부분 같은 여성 일행을 대동하고 야구장에 온다"고 했다.

커피차 보내고 선수 가까운 관중석 선호

관중 구성의 변화는 야구장의 분위기를 바꿨다. 오래전 중장년 남성이 다수일 때의 야구장은 거친 '야생의 공간'이었다. 경기 후반이면 욕설과 야유가 난무했고, 만취한 관중들이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지금의 젊은 관중들은 야구장을 멀티플렉스와 놀이공원, 대형쇼핑몰처럼 즐긴다. SSG 랜더스 김재웅 마케팅팀장은 "젊은 팬들에게 야구장은 사진 찍기 좋은 장소로 포지셔닝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과거처럼 경기 내내 그물망 앞에 붙어 큰소리로 선수 가족을 욕하는 관중은 발붙일 곳이 사라졌다.

다른 수도권 구단 관계자는 "K팝 팬덤 문화가 야구장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나타난다. 응원하는 선수에게 커피차를 보내고, 개성 있는 문구를 스케치북에 써서 응원하는 팬이 많아졌다"면서 "외진 곳에서 열리는 퓨처스리그(2군 리그) 경기조차 아침부터 야구장에 와서 커피차로 응원하는 여성 팬이 많다"고 전했다. NC의 한 관계자는 "요즘 팬 중에는 좌석을 선택할 때 그라운드가 아닌 더그아웃이 잘 보이는 자리를 선호하는 분도 많다"면서 "경기보다는 자기가 응원하는 선수에 포커스를 맞춰 관람한다. 최근엔 중계방송 카메라도 이런 팬들의 시야를 가리지 않는 위치에 설치한다"고 전했다.

갑자기 젊은 팬과 여성 팬이 급증하는 현상에 대해 야구계에선 아직 뚜렷한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선 "야구장이 공연장이나 영화관, 아이돌판에 비해 비용이 적게 드는 공간"이라며 '가성비'론을 주장한다. 한 야구 관계자는 "최근 아이돌판에서 '앨범깡' '포토깡' '팬사컷'이 논란이 되지 않았나. 엄청나게 많은 돈을 투자해야 하는 아이돌판에 부담을 느낀 팬들이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좋은 야구로 옮겨왔다고 본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런 '가성비론'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KBO 한 관계자는 "최근엔 경기 예매가 열리면 제일 비싼 좌석부터 순서대로 팔려나간다. 입장료 외에도 먹거리, 굿즈 구입 등에 지출하는 비용을 생각하면 '가성비'는 크게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는 의견을 내놨다. 또 다른 야구 관계자도 "야구만이 아니라 다른 스포츠 종목이나 E스포츠, 작가 팬덤에서도 아이돌 팬덤과 비슷한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면서 "문화를 즐기는 젊은 세대 특유의 성향이 야구장에 이전, 확산됐다고 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프로야구단 출신 김경민 마케터는 "MZ세대들은 주어진 콘텐츠를 원형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십고 뜯고 맛보고 즐기면서 이를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전달 혹은 과시하고자 하는 특유의 성향을 보인다"는 풀이를 내놨다.

지속적인 관중 감소와 팬층의 고령화로 고민하던 야구계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한 KBO 관계자는 "여성 팬의 증가는 야구의 지속적 인기와 팬층 확대를 위해 중요하다. 젊은 여성팬들이 나중에 결혼하고 자녀를 낳은 뒤에 가족과 함께 야구장을 찾거나, 비혼인 경우에도 평생 야구팬으로 남으면서 선순환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야구 관계자는 "그간 야구 팬덤은 포털 무료 중계로 야구를 보고, 온종일 게시판에서 감독과 선수를 욕하며 시간을 보내는 집단이 온라인상에서 과잉 대표되는 경향이 있었다"면서 "새로운 세대의 팬층은 야구장 직관을 즐기고 기꺼이 지갑을 연다는 점에서 야구 산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온다. 구단들도 온라인 게시판보다는 이런 새로운 고객들의 목소리에 보다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KBO "관중 성향 조사 진행 중"

올 시즌의 흥행 돌풍이 일시적 '유행'에 그칠 가능성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지방 구단의 한 베테랑 직원은 "리그와 구단들이 잘한 부분도 있지만, 그보다는 SNS 문화와 소비 트렌드 같은 야구 외적 요인이 작용한 결과라고 본다"면서 "행운처럼 찾아온 이번 기회를 야구계가 잘 살려야 한다. 새로 찾아온 고객들을 충성 고객으로 만들어 다시는 야구의 위기가 오는 일이 없게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다른 수도권 구단 관계자는 "몇 해 전 MZ세대 사이에서 골프붐이 일었다가 사그라진 예가 있다. 트렌드에 민감하고 유행이 자주 바뀌는 젊은 세대들의 관심이 지금은 야구장에 쏠려 있지만 언제 다른 곳으로 옮겨갈지 모르는 일이다"라면서 "계속해서 팬으로 붙들어두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 야구단 여성 프런트는 "과거와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야구단에는 남성중심적인 문화가 남아 있다"며 "구단 홍보자료나 SNS 게시물부터 선수, 관계자들의 언행에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무의식중에라도 혐오표현이나 성차별적인 말을 사용하지 않도록 항상 신경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프로구단 출신 김경민 마케터는 최근 프로야구의 인기를 치킨 요리에 비유했다. 그는 "치킨 요리의 본질은 닭고기에 있다. 양념 맛이 제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닭고기 본연의 질이 저급하다면 고객들은 결국 이를 외면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각 구단은 현재의 양념 맛에 푹 빠져 있는 팬들에게 '야구경기 콘텐츠'라는 본연의 육질(본질) 맛을 적극적으로 소개해야 한다. '계속 고객'은 이러한 기반하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고, 이는 영속 가능한 프로야구 산업을 만들기 위한 선결 과제다."

KBO 관계자는 "젊은 팬과 여성 팬 증가 현상을 분석해 앞으로를 준비하기 위한 관중 성향 조사를 진행 중"이라며 "지금의 야구 열기를 지속하기 위해 리그 차원에서도 많은 연구와 준비를 하고 있다. ABS 도입 등 각종 제도 개선도 노력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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