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토커] 농구도 나눔도 진심...‘키다리 아저씨’ 한기범의 바람,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해봐야죠”
“농구는 내 전부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가대표 장신 센터였던 한기범 한기범희망나눔 회장은 ‘키다리 아저씨’로 불린다. 진 웹스터의 소설 제목인 ‘키다리 아저씨’는 우리 사회에서 묵묵한 후원자를 표현하는 대명사로 쓰인다. 현역 시절 농구 대잔치의 인기를 느끼며 선수 생활을 보냈던 그는 재단을 운영하며 심장병 환우, 다문화가정, 농구 꿈나무를 돕는 데 온 신경을 쏟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꾸준히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나눔을 실천한다.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죠”
한 회장은 1980~1990년대 뜨거운 인기를 끌었던 농구대잔치 세대다. 205㎝의 장신 센터였던 그는 중앙대학교와 기아자동차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기아자동차의 농구대잔치 7연패를 이끌었던 주역이었다. 한 회장은 “당시 농구대잔치 인기는 엄청났다. 어린이 팬들도 많고 삼성, 현대 등 대기업들의 라이벌 구도가 형성됐다”면서 “중앙대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오빠 부대가 생겨나며 인기를 끌었다. 팬레터를 기준으로 하면 당시 함께 뛰었던 허재는 박스째로 받았다. 저랑 김유택은 그 안에 서너통 정도”라며 미소를 지었다.
당시 센터는 주로 힘을 앞세워 골 밑을 든든히 지켰다. 한 회장은 센터지만 슈팅 능력을 갖췄다. 그는 “당시 중앙대를 이끌었던 정봉섭 감독님께서 슈팅이나 다양한 플레이를 하도록 권장하셨다. 센터는 힘이 탄탄하고 리바운드와 수비를 열심히 해야 했지만 정 감독님께선 하고 싶은 플레이를 하도록 권장하셨다”고 돌아봤다.
이어 한 회장은 “저도 고등학교 때부터 슈팅 감각이 있다고 느꼈는데 감독님을 잘 만났다. 비 농구인 출신이신데 공부를 많이 하셨다고 나중에 들었다. 덕분에 색다른 훈련도 많이 하고 재미있었다”고 덧붙였다.
현대 농구에 적합한 플레이 스타일이었다. 그는 “최근 경기를 보면 뛰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 웃은 후 “외국인 선수들도 있기에 실력이 더 늘지 않았을까 한다. 저희는 대학 때부터 전승해서 목표의식이 강하지 않았다. 우승은 당연했기에 발전보다는 유지에 초점을 맞췄다. 센터로 다양한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서장훈처럼 뛰어보고 싶다”고 전했다.
한기범이 한기범희망나눔 회장이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와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김용학 기자 yhkim@sportsworldi.com |
◆인생을 바꾼 투병 생활
1989~1990 농구대잔치 최우수선수(MVP)를 받은 한 회장은 1996~1997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1997년 12월 프로 원년시즌을 앞두고 발목 부상이 심해져 코트를 떠났다. 한 회장은 “MVP를 받았을 때는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다 보여줬다. 열심히 한 만큼 결과가 따라와서 자부심을 느낀다”면서 “프로에 가고 싶은 마음은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전부터 발목이 너무 안 좋았다. 진통제를 맞고 경기에 나섰는데 부상이 심해져 걸을 때도 뛸 때도 아팠다. 인대가 늘어난 상황에서 연골도 다 닳았다. 뼈끼리 부딪치며 통증이 이어졌다. 당시에는 재활 치료가 없었다. 얼음찜질하면서 침을 맞고 통증이 사라지면 경기에 뛰었다. 재활의 중요성을 느낀 시기였다. 프로에 가면 실력도 못 보여줄 것 같아서 34세의 나이에 은퇴를 결정했다. 은퇴 후엔 발목 수술을 받았다. 지금도 뛰면 무릎이나 발목에 통증이 있지만 그래도 주말마다 농구를 즐기고 있다”고 밝혔다.
마르판 증후군(염색체 이상으로 몸 안 섬유질에 이상이 생기는 증후군)이란 심혈관계 희귀 질환은 한 회장의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10년 뒤에 남동생도 심장마비로 떠났다”면서 “마르판 증후군이란 것을 알게 됐다. 남동생이 떠나면서 나도 검사를 했더니 대동맥이 부풀어서 터지기 직전이라고 하더라. 통증도 없어서 알지 못했다. 당시 수술을 하지 않으면 100% 죽는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설명했다.
한 회장은 “수술을 두 번이나 했다. 처음에는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제적으로 괜찮았지만 두 번째 수술 할 때는 사업에 실패해 집도 차도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한국심장재단에서 후원을 해줘서 수술을 받았다”면서 “그때부터 사회에 갚으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 사람들에 자문해 2011년부터 재단 운영을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어려움은 많았다. 비영리단체이기에 100% 후원으로 재단을 운영해야 했다. 처음 도움을 요청했을 때는 “사기 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들었다. 한 회장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별의별 얘기를 들었다. 보란 듯이 성공하고 보여줘야겠다는 오기로 이어왔다”고 밝혔다.
한기범이 한기범희망나눔 회장이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와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김용학 기자 yhkim@sportsworldi.com |
◆나눔의 기쁨
심장병을 앓았던 한 회장이기에 환우들을 향한 마음이 더욱 애틋하다. 그는 “한 번은 심장병을 앓는 어린이와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아이였는데 인터뷰가 끝나고 나에게 ‘고맙다’고 하셨다”면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선배님들께 여쭤보니 여러 기쁨 중에 나눔의 기쁨이 가장 크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물질적인 것을 사는 기쁨과는 차원이 달랐다. 해본 사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고 설명했다.
심장병 어린이 돕기 뿐만 아니라 다문화가정, 농구 꿈나무를 위한 행사도 지속해서 열고 있다. 한 회장은 “다문화가정 어린이들은 소외된 경우가 많다.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농구든, 스포츠든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신경 쓰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 전했다.
한기범농구교실을 통해 농구 꿈나무 육성에도 힘을 쏟는다. 한 회장은 “요새는 초등학생들도 농구가 아니라 승부를 가르친다. 기초부터 탄탄히 실력을 쌓아야 한다. 공을 다룰 줄 알아야 나중에 드리블, 슈팅도 잘할 수 있다”면서 “시간은 걸릴 수 있으나 그래야 나중에 창의적인 플레이도 잘할 수 있다”고 바라봤다.
힘이 닿는 한 나눔은 계속된다. 그는 “제가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해보겠다. 우리 재단이 비영리단체이기 때문에 경제적인 문제를 안정화하는 것이 첫 번째다. 또, 해외에서 사회 공헌 활동을 더 하고 싶다”면서 “올해 필리핀에서 농구 교실을 열고 농구장도 조성했다. 보건소가 한 곳밖에 없어서 후원을 받아 의료용품도 지원했다. 계속해서 이어갈 생각”이라고 미소를 지었다.
농구로 사회에 건강한 메시지를 전한다. 한 회장은 “농구는 내 전부다. 농구협회나 한국농구연맹(KBL)에 속해있진 않지만 앞으로도 멋진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고 싶다”면서 “농구인들도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앞으로도 계속 보여주려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