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돋보였던 실력과 말썽도 많았던 아이반 존슨

[바코 인사이드] 돋보였던 실력과 말썽도 많았던 아이반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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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에 프로농구를 뛰었던 선수 중 일부는 NBA에 진출하기도 했다. 아비 스토리와 그렉 스팀스마, 말콤 토마스 등이 대표적이었다.
 

아이반 존슨도 그 중 하나다. KBL에서 두 시즌을 보낸 그는 팀의 전력에 큰 도움이 됐다. 이후 NBA 선수로 거듭 나서면서, 선수로서의 가치를 더욱 높였다. 그러나 본인의 감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물의를 일으켰다. KBL에서는 제명을 피하지 못했다.




프로 진출 이전
샌안토니오 출신인 존슨은 고교 시절에 나름 두각을 보였다. 비록 프로에서는 경쟁력을 갖기 어려웠지만, 대학에서는 농구를 하기 충분했다. 그러나 학교를 1년마다 옮겨다녔다.
 

시스코대학에 입학한 존슨은 2002~2003시즌을 그 곳에서 보냈다. 그러나 존슨은 다른 학교로 옮겼다. 전학으로 인해 징계도 받았다. 이후 존슨은 LA에 위치한 사우스웨스트대학을 거쳤다. 2학년을 맞은 존슨은 무려 평균 22.3점 12.2리바운드 2.4블록슛을 기록했다. 안쪽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선보여, 출전 기회를 창출했다.
 

2학년을 마친 존슨은 좀 더 큰 무대에서 뛰길 바랐다. NCAA 오리건 덕스에서 소망을 이뤘다. 비로소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존슨은 오리건에서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버나디노에서 마지막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NBA 진출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미 대학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소요했고, 3~4학년 때 두각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 그래서 존슨은 NBA D-리그(현 G-리그)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당시에는 D-리그가 NBA의 완전한 마이너리그가 아니었기에, 존슨이 NBA 진출을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현재처럼 승격 및 강등 체제도 마련되지 않았기에, 존슨이 NBA에 입성하긴 더 어려웠다.

창원에서
D-리그에서 한 시즌을 보낸 존슨은 해외에서 선수 생활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D-리그에서 특급으로 분류되는 선수들이 유럽으로 향하는 것과 달리, 존슨은 한국으로 눈길을 돌렸다. 유럽 진출도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좀 더 많이 뛸 수 있는 곳을 바랐기 때문. 존슨은 결국 KBL 외국 선수 트라이아웃에 명함을 내밀었다.
 

당시 LG 신임 사령탑이었던 강을준 감독이 팀을 바꾸고자 했다. 외국 선수도 바꾸기로 했다. KBL에서 뛰었던 브랜든 크럼프를 주전 센터로 낙점했고, 다음 순번에서 존슨을 지명했다. 또한, LG는 귀화혼혈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3순위로 문태영을 지명했다. 존슨은 그런 문태영과 주포를 이뤘고, LG는 존슨과 문태영의 활약에 힘입어 좋은 발판을 마련했다.
 

외국 선수 조합도 나쁘지 않았다. 몸싸움에 능한 크럼프가 있을 때, LG는 지키는 농구로 높이를 극대화했다. 반면, 존슨은 공격력으로 기대를 모았다. 또, 리바운드와 몸싸움에서도 다른 외국 선수에 밀리지 않았다. 슛 거리까지 길어, 팀에 상당한 도움이 됐다.

그 결과, 존슨은 2008~2009 정규리그에서 평균 19.1점 7.1리바운드로 맹활약했다. KBL 첫 시즌임에도, 리그에 잘 안착했다. LG의 수준급 전력으로 거듭났다. 안쪽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발휘한 것은 물론, 외곽슛과 드리블로 상대 빅맨을 잘 요리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LG는 플레이오프로 향했다. 그러나 6강 플레이오프에서 높이를 갖춘 원주 동부(현 원주 DB)에 패했다. 아쉬움을 남겨야 했다.
 

또, 존슨은 정규리그 중 심판 판정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신경질적인 면모까지 보이면서, 많은 테크니컬 파울을 범했다. 강을준 감독도 존슨을 벤치에 앉혔다. 일종의 극약 처방이었다. 어쨌든 존슨은 지나치게 흥분하면서 경기를 그르쳤다.

전주에서
존슨은 2008~2009시즌 종료 후 LG와 재계약하지 못했다. 기록으로는 한 시즌 더 함께 하기 충분했으나, LG는 감정 조절을 약점으로 삼는 존슨을 원하지 않았다. 다른 선수를 찾길 바랐다.
 

그 사이, 전주 KCC(현 부산 KCC)가 존슨을 택했다. 당시 KCC는 하승진과 마이카 브랜드를 핵심 전력으로 삼았다. 여기에 존슨이 가세하면서, KCC의 높이는 더 막강해졌다.
 

KCC는 존슨을 하승진과 함께 내세웠다. ‘높이’라는 장점을 극대화했다. 또, 존슨이 KCC에서 위력을 더 강하게 떨쳤다. 하승진이 상대 외국 선수를 막아줬기 때문. 반대로, 존슨은 공격에서도 상대 국내 선수를 상대했다. 그렇기 때문에, 존슨이 공격에서 손쉽게 득점을 추가할 수 있었다. KCC도 크게 도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KCC는 2009~2010시즌 중에 서울 삼성과 트레이드했다. 다소 아쉬웠던 브랜드를 보내는 대신, 리그 최고 외국 선수로 꼽혔던 테렌스 레더를 데려왔다. 이로 인해, KCC의 골밑 경쟁력은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하승진이 부상으로 이탈했다. KCC의 높이가 빛을 잃었다. 하지만 KCC는 레더와 존슨으로 외국 선수 진영을 꾸리면서, 하승진 없이도 다른 구단에 충분히 대응했다. 레더와 존슨의 지배력과 전태풍과 강병현(현 LG 코치)의 외곽 득점이 다양한 색깔을 만들었기 때문. KCC 또한 3위로 2009~2010 정규리그를 마쳤다.
 

KCC는 6강 플레이오프에서 트레이드 당사자였던 삼성과 마주했다. KCC는 삼성을 손쉽게 따돌렸다. 곧바로 열린 4강 플레이오프에서는 부산 KT(현 수원 KT)를 만났다. KT를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았고, 4강 플레이오프를 네 경기만에 끝냈다. 두 시즌 연속 챔피언 결정전에 나섰다.
 

존슨은 챔피언 결정전에서도 좋은 기록을 남겼다. 그렇지만 언행이 문제였다. 시리즈 도중 불필요한 행동으로 불필요한 충돌을 일으켰다. 그리고 심판에게도 욕설을 퍼붓는 등 프로 선수답지 못한 행동을 저질렀다. 이후 엄청난 벌금과 함께, KBL로부터 영구 제명됐다.

한국을 떠난 이후
2009~2010시즌을 종료한 존슨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D-리그에서 한 시즌을 보냈던 존슨은 2011~2012시즌 중 애틀랜타 호크스의 부름을 받은 것. 심지어 애틀랜타에서 많은 경기를 뛰었다. 

백업 파워포워드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기 때문. 해당 시즌 56경기에서 경기당 16.7분을 뛰었고, 평균 6.4점(필드골 성공률 : 51.3%, 3점슛 성공률 : 33.3%, 자유투 성공률 : 72.0%) 4리바운드를 기록했다. KBL에서는 저조했던 자유투까지 끌어올렸다.
 

당시 애틀랜타는 조 존슨을 필두로, 조쉬 스미스-알 호포드-제프 티그-자자 파출리아-마빈 윌리엄스 등 뛰어난 라인업을 자랑했다. 존슨은 커크 하인리히-트레이시 맥그레이디- 윌리 그린 등과 벤치에서 출격했다. 안쪽에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다. 시즌 막판에는 생애 최다인 21점을 퍼붓기도 했다.
 

존슨은 2011~2012시즌 종료 후 애틀랜타와 재계약을 했다. 이전 시즌과 엇비슷한 활약을 펼쳤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좀 더 중용됐다. 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력으로 거듭났다.
 

그 후에는 중국리그의 저장 골든 불스에서 한 시즌을 보냈다. 2014년 여름에는 댈러스 매버릭스와 계약했다. 그러나 개막 직전 방출을 당했다. 

NBA라는 험난한 무대에서 생존하지 못했다. 댈러스 산하 D-리그 구단인 텍사스 레전즈로 향했으나, 시즌 중후반에 결별해야 했다. 텍사스와 결별한 존슨은 그 후 필리핀과 이란, 레바논 등에서 뛰었다. 2019년에는 멕시코에서 뛰었다. 멕시코를 끝으로,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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