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로들,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정지석이 어떻게든 리시브 스틸을 시도한 이유
리베로를 경험한 정지석의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이 한 뼘 더 성장했다.
대한항공의 공수겸장 정지석은 여름의 일본 전지훈련부터 컵대회와 이번 시즌의 1라운드 중반부까지 리베로 유니폼을 입고 코트에 나섰다. 정강이 피로골절의 여파로 인해 몸 상태가 빠르게 올라오지 않아, 아웃사이드 히터로 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지석의 실전 감각 회복과 리베로 포지션의 옵션 추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토미 틸리카이넨 감독은 정지석 리베로 카드를 한동안 활용해왔다.
그러던 정지석은 1라운드 KB손해보험전을 기점으로 본업인 아웃사이드 히터로 복귀했다. 꽤 길었던 공백기에도 불구하고 기량은 명불허전이었다. 매 경기 두 자릿수 득점을 터뜨리며 좋은 활약을 이어갔다. 24일 안산 상록수체육관에서 치러진 OK저축은행과 대한항공의 도드람 2024-2025 V-리그 2라운드 경기에서도 정지석은 좋은 활약을 펼쳤다. 63.64%의 공격 성공률로 블로킹 2개 포함 14점을 터뜨렸다. 24점을 퍼부으며 날아오른 막심 지갈로프(등록명 막심)와 함께 팀 공격을 쌍끌이한 정지석이었다.
경기 종료 후 인터뷰실을 찾은 정지석은 “경기 전 웜업 때 안산에 홈팬 분들이 많이 오신 걸 느꼈는데, 역시나 경기 초반에 약간 홈팀의 분위기와 흐름에 눌리는 게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점 3점을 챙겼다. 동료들에게 고생했다고 해주고 싶다”며 승리 소감을 먼저 전했다.
“지금 공격에서는 80~100% 사이에서 그날그날의 몸 상태에 맞게 에너지를 조절하고 있다. 서브에서도 최대한 욕심을 내려놓으려고 하는 중”이라며 컨디션에 맞춰 플레이의 수위를 조절하고 있음을 밝힌 정지석은 “이번 경기 같은 경우 상대가 하이 리스크 플레이를 하는 팀은 아니기 때문에, 나도 같이 범실을 줄이고 안정적으로 플레이하려고 했다”며 OK저축은행을 상대한 방식을 함께 소개했다.
이후 정지석은 경기 내용과 상대의 플레이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히 들려줬다. 먼저 지난 시즌과는 달리 세터와 떨어져서 돌아가는 로테이션을 배정받은 것에 대해 정지석은 “세터를 따라가는 자리에서는 공격 옵션이 더 적은 상황을 많이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세터와 떨어진 자리에 서는 게 공격적인 부담감이 좀 덜한 건 맞다. 다만 우리의 로테이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 매치업이 누구인가라고 생각한다. 이번 경기 같은 경우 지난 경기에서 블로킹이 너무 매서웠던 이민규를 피해갈 수 있는 자리에서 때릴 수 있어서 좋았다”며 설명과 함께 솔직한 만족감도 전했다.
정지석은 크리스티안 발쟈크(등록명 크리스)와 신호진이 번갈아 나선 OK저축은행의 아포짓 자리에 대해서도 코멘트를 남겼다. 그는 “크리스가 있을 때는 아무래도 블록 높이가 높아지고, 크리스를 역이용해서 반대 플레이를 만드는 상황도 많이 나온다. 대신 신호진이 들어오면 팀 조직력이 확실히 살아난다. 신호진은 전 구단의 공격수들을 통틀어도 막기 정말 까다로운 선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기술이 워낙 좋고, 무리한 플레이도 하지 않는다”며 두 선수 모두 각자의 강점이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경기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려준 뒤, 정지석은 이날 경기를 포함해 합류 후 팀의 상승세를 이끌고 있는 막심에 대한 칭찬도 빼먹지 않았다. 그는 “역시 베테랑이다.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본인이 해야 하는 것들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잘해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더 잘하고 있는 것 같다. 팀 입장에서는 막심과 요스바니 에르난데스(등록명 요스바니)를 두고 행복한 고민이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며 막심을 치켜세웠다.
이후 정지석과 리베로로 뛰었던 비시즌과 시즌 초반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그는 “역시 경기감각을 살릴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또 리베로들의 고충을 느낄 수 있었던 것도 크다. 실수를 하더라도 그걸 득점으로 만회할 수 없는 포지션이기 때문에 더 답답하고 힘들다”며 리베로를 경험하며 느낀 점들을 전했다.
실제로 이날 리베로로 나선 강승일과 승민근은 경기 중반부에 한때 어려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OK저축은행의 서브와 공격이 날카로워지는 시점에 집중 공략을 당했다. 동생들의 고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정지석은 최대한 동생들을 돕기 위한 플레이를 시도했다고 밝혔다. 그는 “1번 자리에 서는 리베로 쪽으로 상대의 서브 공략이 너무 많이 들어왔다. 그래서 최대한 코트 중앙에서 리시브 스틸을 노리면서 상대를 교란시키려고 했다. 그럼에도 상대 서브 공략이 내 플레이에 흔들리지 않고 들어왔지만, 그래도 짐을 덜어주고 싶어서 계속 시도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렇게 동료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도움을 주며 팀의 4연승에 기여한 정지석은 이제 대전으로 떠나 삼성화재를 상대한다. 그는 “외인 쌍포를 구축하고 있는 팀이라, 거기서 화력이 폭발해버리면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절대 방심하면 안 된다. 이번 경기 복기를 잘하면서 우리가 믿고 있는 우리 팀의 강력한 배구를 잘 보여주겠다”며 5연승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그저 실전 감각을 키우는 일종의 연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순간에도 정지석은 무언가를 배우고 느꼈다. 그리고 코트에서의 플레이에도 자신이 배우고 느낀 것에 맞춰 변주를 줬다. 이런 것이야말로 팀의 에이스다운, 남들과는 다른 ‘보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