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토커]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한국 배구, 세대교체가 답이다
배구의 시간이 끝났다. 여자배구는 현대건설, 남자배구는 대한항공의 우승으로 2023~24 시즌에 마침표가 찍혔다. 현대건설은 13년 만에 통합우승을 일궈냈고, 대한항공은 4연속 통합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결과지를 냈다. 지금껏 V리그에서 4시즌 연속 왕좌를 지킨 팀은 남녀 통틀어 대한항공뿐이다.
배구 흥행은 이어졌다. 현대건설·흥국생명·정관장이 오른 여자부 포스트시즌은 계속 시청률 2%를 넘었다. 관중 수도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정규리그 동안 남자배구는 23만6891명, 여자배구는 31만141명이 찾았다. 2012 런던올림픽 4강 신화 이후 여자배구 인기는 꾸준히 상승해 왔고, 2020 도쿄올림픽(2021년 개최) 4강의 기적 이후 정점을 찍으며 남자배구보다 훨씬 많은 관심을 받았다.
남녀 배구 모두 치열한 순위 싸움이 펼쳐지면서 정규리그 1위가 마지막 날에 결정되는 진풍경도 연출됐다. 현대건설은 마지막 경기에서 페퍼저축은행을 꺾으며 극적으로 1위에 올랐다. 승점 3점을 보태면서 최종 승점 80점(26승10패)으로 흥국생명(28승8패·승점 79점)을 1점 차로 제쳤다. 결과적으로 플레이오프전으로 밀린 흥국생명은 정관장과 3경기 접전을 벌이면서 체력을 소모하고 챔프전에 올라 현대건설을 상대해야만 했다.
대한항공은 정규리그 경기를 모두 마치고 쉬는 와중에 맨 꼭대기에 자리하게 됐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1위 경쟁을 펼치던 우리카드가 삼성화재에 세트 스코어 2대3으로 덜미가 잡혔기 때문. 승점 1점만 확보하면서 우리카드의 승점은 70점(23승13패)에 머물렀고, 승점 71점(23승13패)의 대한항공이 행운의 1위를 차지했다.
남자부의 경우 준플레이오프 대진도 극적으로 결정됐다. 현대캐피탈이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OK금융그룹과 풀세트 접전을 벌이고 승리하면서 4위로 포스트시즌 막차를 탔다. 3·4위 간 승점 차이가 3점 이하가 아니면 준플레이오프는 이뤄지지 않는다.
정규리그 마지막까지 간 순위 다툼 이면에는 아시아 쿼터로 한국 배구 무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선수들의 쏠쏠한 활약도 있었다. 아시아 쿼터는 기존 외국인 선수 외에 드래프트를 통해 동아시아·동남아시아 10개국 선수를 팀당 1명씩 뽑도록 한 제도다.
처음 시행된 아시아 쿼터 아래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선수는 여자배구 정관장의 메가왓티 퍼티위(등록명 메가)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메가는 이슬람교 신자로 매 경기 히잡을 쓰고 뛰었다. 메가는 정규리그 35경기에서 736득점을 기록해 득점 7위에 올랐다. 공격 성공률은 4위(43.95%), 서브는 2위(세트당 평균 0250)였다. 태국 출신의 아웃사이드 히터 위파위 시통(등록명 위파위)은 챔피언결정전 세 경기에서 31득점을 한 가운데 디그 1위(세트당 4.067개), 수비 1위(세트당 5.667개)에도 오르며 현대건설의 우승을 도왔다. 강성형 현대건설 감독은 통합우승을 확정한 후 '숨은 공신'으로 위파위를 꼽기도 했다.
남자배구에서는 OK금융그룹 미들블로커 바야르사이한(몽골)의 활약이 눈에 띄었다. 바야르사이한은 블로킹에서 6위에 오르는 등 레오나르도 레이바(등록명 레오)와 함께 OK금융그룹의 봄배구 진출에 앞장섰다. 일본인 리베로 이가 료헤이(한국전력) 또한 뛰어난 수비력으로 디그 전체 1위에 올랐다. 팀 전력 평준화 등에 아시아 쿼터 선수들이 일정 부분 이바지했다는 평가 아래 한국배구연맹(KOVO)은 2024~25 시즌부터 아시아 쿼터 대상 국가를 아시아배구연맹(AVC) 64개 회원국 전체로 확대하기로 했다.
베테랑 선수들의 기록 경신도 이번 시즌 하나의 볼거리였다. 대한항공의 베테랑 세터 한선수는 1월12일 현대캐피탈과의 경기에서 역대 1경기 최다 세트 기록을 갈아치웠다. 역대 정규리그 남자부 최장시간 경기(171분)로 기록된 이날 경기에서 한선수는 77개의 세트(공격 성공 토스)를 적립했다. 그는 남녀 최초로 세트 1만8000개를 달성하기도 했다. 역대 세트 성공은 1만8886개.
여자부 양효진(현대건설)은 남녀 배구 통틀어 통산 1500개 블로킹 성공의 대기록을 썼다. 지난해 12월16일 정관장과의 경기에서 수립했는데, 정규리그를 마친 후 그의 통산 블로킹 수는 1560개가 됐다. 2007~08 시즌에 프로에 데뷔해 네트 앞에서 7595차례 뛰어올라 성공한 횟수다. 양효진은 득점에서도 7574점(500경기)을 올려 남녀 최다 득점자 자리를 견고히 지키고 있다.
남자배구 최고의 미들블로커 신영석(한국전력)은 남자 최초로 1200개 블로킹 고지를 밟았다. 미들블로커 최초로 4000득점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통산 성적은 블로킹 성공 1227개, 4153득점.
높은 연봉에 비해 국제대회 성적은 '처참'
베테랑이 여전한 기량을 선보이는 가운데 신진급 선수들도 도약했다. 남자배구의 경우 블로킹 1, 2위를 이상현(우리카드)과 김준우(삼성화재)가 차지했다. 이상현은 1999년생, 김준우는 2000년생이다. 신영석(1986년생)은 3위였다. 세트 부문에서도 프로 2년 차 한태준(우리카드)이 2위에 올라 가능성을 보였다. 한태준은 2004년생으로 4월5일에 만 스무 살이 됐다. 1999년생인 임동혁(대한항공), 임성진(한국전력), 김지한(우리카드)도 이번 시즌을 통해 각 팀의 에이스로 자리 잡았다. 임동혁은 559득점으로 국내 선수 득점 1위에 올랐다. 공격 성공률은 1위(56.02%)였다. 본격적인 세대교체의 신호탄이다.
여자배구에서도 양효진을 밀어내고 최정민(IBK기업은행)이 '블록퀸'이 됐다. 최정민은 2002년생이다. 속공에서도 이다현(현대건설·2001년생)이 팀 선배 양효진을 밀어내고 1위에 올랐다. 하지만 공격 부문은 여전히 '김연경 천하'다. 김연경은 득점 6위(775점), 공격 성공률 2위(44.98%), 리시브 5위(효율 42.46%)에 올랐다. 한 배구 관계자는 "남자배구의 경우 1998년생, 1999년생 등이 리그를 이끌어가고 있어서 희망이 보이는데, 여자배구는 이소영·강소휘 이후가 안 보인다. 무게감 있는 공격수가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여자배구는 인기의 축이 되어주던 국제대회 성적이 최근 저조해 '지속 가능한 인기'에 빨간불이 들어온 상태다.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2년 연속(2022, 2023년) 12전 전패의 성적을 냈고, 지난해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는 17년 만에 노메달에 그쳤다. 사실상 2024 파리올림픽 본선 출전도 좌절됐다. 남자배구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이후 올림픽 본선에 진출한 적이 없다.
2023~24 시즌 남자배구 평균연봉은 2억2900만원, 여자배구 평균연봉은 1억5200만원이었다. 올해 프로야구 평균연봉(1억5495만원)과 비슷하거나 높다. 하지만 높은 연봉에 비해 국제대회 성적은 처참해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했다는 우려도 있다. 잔치는 끝났지만 숙제는 여전히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