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토커] 수렁에 빠진 페퍼저축은행, 6라운드 분전은 신호탄이었나 혹은 회광반조였나 [V-리그 결산⑬]
코트 안팎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후반부의 분전이 어떤 의미인지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도드람 2023-2024 V-리그가 막을 내렸다. 남자부와 여자부의 엔딩이 비슷했다. 여자부는 1일 현대건설이 흥국생명을 꺾으며, 남자부는 2일 대한항공이 OK금융그룹을 꺾으며 각각 통합우승을 달성했다. 그렇게 누군가는 환희의 웃음을 지으며, 누군가는 아쉬움의 눈물을 감추며 시즌이 끝났다.
시즌이 모두 끝난 지금은 각 팀이 이번 시즌 어떤 결과를 맞이했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살펴보며 전체적인 복기를 해보는 결산 시간을 가져보기 좋은 시기다. <더스파이크>가 마지막으로 결산해볼 팀은 과감한 투자의 결실을 맺지 못한 여자부 최하위 팀, 페퍼저축은행이다.
*페퍼저축은행: 정규리그 7위(5승 31패, 승점 17)
도전을 천명한 막내 구단의 과감한 투자, 그러나…
창단 후 두 시즌 연속 최하위에 머무른 페퍼저축은행은 2023-24시즌을 앞두고 본격적인 도전을 천명했다. FA 시장 최대어였던 박정아에게 개인 연봉 상한선인 7억 7천 5백만 원을 안기며 페퍼저축은행 유니폼을 입혔고, 여기에 베테랑 채선아까지 추가로 영입했다. FA 집토끼였던 이한비와 오지영 역시 섭섭지 않은 대우로 눌러 앉혔다.
외국인 선수로는 허리 부상 리스크가 있긴 하지만 기량은 충분히 검증된 야스민 베다르트(등록명 야스민)를 영입했고, 뎁스가 부족한 중앙을 보강하기 위해 아시아쿼터 카드로는 미들블로커 MJ 필립스(등록명 필립스)를 영입했다. 그리고 이렇게 도전에 나서는 팀을 이끌 사령탑으로 우여곡절 끝에 조 트린지를 선택했다.
그러나 시즌이 마무리된 지금, 당시의 모든 행보 중 성공적이었던 행보는 야스민을 선택한 것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다. 박정아는 시즌 후반부에 폼을 끌어올리며 좋은 활약을 하긴 했지만 조금 과한 슬로우 스타터였고, 이한비 역시 마찬가지로 대표팀 일정 소화의 여파인지 지난 시즌에 비해 중반까지의 활약이 부족했다. 채선아 역시 마찬가지로 리베로 자리에 본격적으로 녹아들기 전까지는 극도의 부진에 시달렸다.
후술하겠지만 오지영과 트린지는 배구 역량과는 별개로 팀의 시즌을 끝까지 함께 하지도 못했기에 평가 자체가 무의미하다. 필립스는 1라운드와 6라운드의 활약이 좋았지만 2~5라운드가 다소 아쉬웠기에 성공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처럼 야스민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택이 기대했던 방향보다는 우려했던 방향으로 나아가버린 페퍼저축은행은 결국 공격적인 투자의 효과를 보지 못한 채 시즌을 마쳤다.
코트 안에서도, 밖에서도 이어지는 불협화음과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수장
페퍼저축은행은 배구 팀이지만, 그들의 2023-24시즌을 돌아봤을 때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이야기는 배구 외적인 이야기라는 점은 이미 그들의 시즌이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이는 바로 오지영의 직장 내 괴롭힘 논란이다. 2월 27일 한국배구연맹(KOVO) 상벌위원회에서 후배에 대한 괴롭힘을 이유로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고, 페퍼저축은행은 이에 오지영과의 계약을 해지했다. 이 건은 오지영이 연맹에 항소하는 대신 연맹과 구단을 상대로 법적 대응에 나서기로 결정하면서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만약 오지영이 승리하는 결말이 나오게 되면 페퍼저축은행은 다음 시즌 도중에라도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코트 안에서도 선수들 간의 호흡은 6라운드 이전까지 썩 좋지 않았다. 이고은과 공격수들의 사인이 어긋나면서 공이 허공에서 떠도는 장면이 잊을만하면 나왔고, 이고은 대신 코트를 밟는 박사랑도 시즌 후반부에 접어들기 전까지는 기복이 심각했다. 트린지 감독의 컨트롤 하에 수비 위치와 방식에도 변동이 있었지만 이를 바로 수용하기란 쉽지 않았기에 수비 상황에서의 호흡도 흔들렸고, 이 과정에서 선수단이 트린지 감독에게 “이건 우리의 역량 밖”이라는 이야기를 전하는 상황까지 전개됐다. 적극적인 콜 플레이도, 서로를 격려하는 파이팅도 부족했다.
이 과정에서 트린지 감독의 경기 운영과 선수단 관리 능력 역시 오지영 사태를 차치하더라도 수준 이하였다. 염어르헝의 1세트 기용을 방어 관련 스탯 향상을 근거로 지속하다가, 승패 마진으로는 전혀 이득을 보지 못했고 심지어 염어르헝이 무릎 수술로 시즌을 이탈하게 되는 최악의 결말을 맞이했다. 네트를 스치듯 지나가는 빠른 플로터 서브로 팀의 서브 체질 자체를 개선하려는 시도 역시 결국 박연화와 하혜진 정도를 제외한 어떤 선수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또 선수단과의 교감과 소통에도 적극적이지 못했고, 극단적인 변화라도 시도해야 했던 연패 기간에도 신인 선수들에게 한 차례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부분 역시 아쉽다.
킹메이커로 거듭났던 6라운드의 분전, 그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지기만 하던 페퍼저축은행이 달라진 모습을 보인 라운드는 다름 아닌 정규리그의 마지막 라운드인 6라운드였다. 무려 23연패를 당하고 있던 상황에서 6라운드 첫 경기였던 한국도로공사를 상대로 값진 승리를 거뒀고, 이후 1위 경쟁으로 갈 길이 바쁜 흥국생명을 홈에서 세트스코어 3-1로 잡아내며 리그 판도를 뒤흔들었다.
내친김에 다음 경기였던 정관장전까지 승리를 거둔 페퍼저축은행은 창단 첫 연승과 정관장전 승까지 챙겼다. 마지막 경기였던 현대건설전에서 아쉽게 패하며 3연승에는 실패했지만, 페퍼저축은행은 절체절명의 순간 흥국생명과 현대건설을 괴롭히면서 여자부의 킹메이커로 발돋움했다. 6라운드의 최종 성적은 3승 3패, 획득한 승점은 9점이었다.
이 과정을 이끈 이경수 당시 감독대행(현 사무국장)과 그를 따른 선수들의 역량이 돋보이기도 했다. 특히 꾸준히 기회를 얻은 끝에 조금씩 잠재력을 만개시킨 박사랑과 자리를 아웃사이드 히터로 옮긴 뒤 맹활약을 펼친 야스민, 야스민의 대각에서 함께 반등에 성공한 박정아와 오지영의 빈자리를 메운 채선아 등이 좋은 모습을 보였다.
다만 이러한 선수들과 팀 전체의 반등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아직 단정하기 어렵다.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사람이 죽기 직전에 일시적으로 잠시 온전히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꺼지기 직전 환하게 타오르는 불꽃에 비유한 말이다. 어쩌면 페퍼저축은행의 6라운드 활약도 회광반조처럼 그저 시즌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발휘된 단발성의 힘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당시의 반등이 다가올 다음 시즌의 희망을 미리 드러낸 신호탄이었길 페퍼저축은행의 팬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다. 페퍼저축은행의 구성원들이 팬들의 바람을 이뤄주기 위해서는 이번 비시즌부터 진지하고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