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토커] 한국-캐나다 레전드 리베로가 한 자리에! 좋은 리베로에 대한 고찰과 대담
지난 3월호에서 좋은 세터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최고의 세터 전문가 신영철 감독을 찾아갔던 <더스파이크>가 이번에는 좋은 리베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또 다른 전문가를 찾았다. 이번에는 두 명의 이야기를 동시에 들어볼 수 있었다. 선수 시절부터 코치로 활동하는 지금까지 대한항공 ‘원클럽맨’으로서 헌신하고 있는 V-리그의 레전드 리베로 최부식 코치와, 2016 국제배구연맹(FIVB) 월드리그(발리볼네이션스리그의 전신)에서 베스트 리베로 상까지 수상했던 캐나다의 레전드 리베로 출신 블레어 벤 코치가 그 주인공이다.
Q. 두 레전드 리베로와 이야기를 나누게 돼 영광입니다(웃음). 가장 먼저 좋은 리베로 새싹을 찾을 때 중요하게 지켜보는 요소는 무엇인가요. 이것이 곧 좋은 리베로가 되기 위한 선천적 조건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블레어 벤 코치(이하 블레어) - 좋은 리베로가 될 자원이라면 단연 수비와 리시브에서는 확연한 실력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또 선수들을 이끌어나갈 줄 아는 에너지와 경기 중에 고무적인 상황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도 지켜봅니다.
최부식 코치(이하 부식) -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선수들이기 때문에, 디테일한 것들보다는 볼 컨트롤 감각, 즉 볼을 부드럽게 다룰 줄 아는 능력을 중점적으로 봅니다. 그 다음은 코트 안에서 경기에 임하는 자세를 지켜봅니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리베로인지, 팀을 이끌 수 있는 선수인지를 확인해보죠.
Q. 그렇다면 좋은 리베로가 되기 위해 선천적인 재능과 노력 중 더 중요도가 더 큰 것은 무엇일까요?
부식 - 어우, 어려운 질문이네요. 일단 재능이 타고난 애가 열심히 하는 게 최고겠죠(웃음)?
블레어 - 당연히 재능이 중요합니다. 재능이 없으면 결국 노력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경우가 있거든요. 그리고 노력의 경우에는 어떻게 노력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두려움 없이 모든 걸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있어야 의미 있는 노력이 됩니다. 하지만 저 같은 경우는 재능보다는 노력으로 만들어진 선수였죠(웃음).
부식 -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금 뭔 소리야…? 무튼 저도 타고난 재능이 일단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후천적인 노력으로 그걸 극복하려면 블레어가 언급한 마인드가 굉장히 중요할 것이고요.
Q. 그럼 이제는 본격적으로 리베로들의 플레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아웃사이드 히터들도 리시브와 수비에 전담하는 것은 리베로들과 같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베로들이 아웃사이드 히터들과 수비적인 부분에서 차별화되는 지점이 있다면요?
부식 - 일단 범위를 무조건 더 넓게 가져갈 수 있도록 플레이하는 게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상대가 우리 팀의 아웃사이드 히터에게 목적타 플로터 서브를 때리려고 한다면, 리베로들이 예상 범위 밖에서 숨어 있다가 순간적으로 공간을 파고들면서 상대의 목적타를 스틸해버리는 플레이가 이뤄지면 좋습니다. 이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 아웃사이드 히터들과 리베로들이 수비에 있어서 경기를 지배하는 방식은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블레어 - 부식 코치의 말이 맞아요. 큰 차이는 없습니다. 다만 전술적으로는 리베로가 6번 자리에서 최대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게 하는 디테일을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 됩니다.
Q. 리베로가 하는 것이 디그와 리시브만 있는 것은 아니죠. 하이볼 상황에서는 2단 연결 역시 리베로들의 주된 과제 중 하나입니다. 연결 과정에서는 리베로들에게 어떤 것들을 주문하나요?
부식 - 우리 팀의 경우는 무조건 스피드죠(웃음).
블레어 - 그래서 가능한 오버핸드 패스를 구사하라는 주문을 합니다. 만약 언더핸드 패스를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오버핸드 패스 못지않은 스피드를 낼 것을 강조하죠.
부식 - 우리 팀뿐만 아니라 리베로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 거라면 오버핸드 패스가 가능한 선수인지, 상황에 맞게 패스의 거리나 높이를 컨트롤할 수 있는 선수인지 등을 잣대로 리베로의 연결 능력을 평가하게 됩니다.
Q. 료헤이 이가(등록명 료헤이)의 등장 이후 좋은 리베로는 볼을 받은 뒤 넘어지면 안 된다는 평가의 잣대가 대두됐습니다. 볼을 받을 때 넘어지는 플레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부식 - 넘어져야 되는 상황에서는 넘어져야 합니다. 다만 불필요한 상황에서 안 넘어져도 되는데 넘어지는 플레이를 하는 건 좋지 않죠. 리베로가 리시브를 한다고 자신의 상황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파이프 옵션이 살아 있는지에 따라 커버 범위를 지휘하고 조절해야 하는데, 넘어져 있으면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쓸 수가 없죠.
블레어 - 이게 한국 리베로들의 습관적인 플레이인 것 같아요. 대학 때 한국에 온 적이 있는데, 캐나다로 돌아가고 나서 연습 때 찬스 볼을 받는 상황에서 장난삼아 그 때 봤던 ‘한국 스타일’로 넘어지면서 받고 그랬던 기억도 나요. 기본적으로는 넘어지지 않아야 다음 플레이에 대한 이해도를 더 높게 가져갈 수 있어요.
부식 - 저도 리시브를 처음 배울 때는 넘어지면서 배웠어요. 괜히 안 넘어지려다가 못 받으면 열심히 안 한다고 선배들한테 혼났고, 넘어지면서 못 받으면 그냥 넘어가주고 그랬거든요. 어떻게 보면 면피성 플레이였던 거죠.
Q. 그 외에 두 코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리베로들의 플레이 속 디테일이 있다면요?
부식 - 저는 항상 쉬운 볼을 잘 받아야 잘하는 리베로라고 선수들에게 이야기해요. 정확히는 쉬운 볼을 받을 때 얼마나 정확하게 세터에게 전달하는지가 핵심이죠. 그게 결국 우리가 늘 강조하는 원활한 사이드 아웃의 첫 시작이 되는 거니까요.
블레어 - 아까 부식 코치가 잠깐 서브 스틸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죠. 그런 부분은 단순한 임기응변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상대의 5번 자리 목적타를 리베로가 스틸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목적타 코스 예측과 리베로의 동선 설정이 모두 전술적으로 미리 준비돼야 해요. 그리고 리베로는 코트 위에서 그 전술을 이행해야 하죠. 이 과정이 얼마나 매끄럽게 이뤄지는지는 리베로의 전술 수행능력에 달린 거라서, 이 부분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Q. 기술적인 부분만큼이나 멘탈적인 부분도 리베로들에게는 특히 중요할 것 같습니다. 공격수들처럼 실수를 만회할 두 번째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 않으니까요.
부식 - 저는 실수를 극복하는 걸 정말 어려워했던 선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선수들에게는 그 때의 제 경험을 많이 이야기해줘요. ‘내가 만약 그 때 이런 플레이를 했더라면’ 하는 후회들을 선수들에게 말해줍니다. 선수들은 제가 했던 후회를 하지 않도록, 늘 강하게 밀어붙이라는 피드백을 더해서요. 또 몇 개의 실수에 대해 너무 미련을 갖지 말라는 이야기도 해줘요. 리베로는 10개 중 9개를 잘 받아도 못 받은 1개 때문에 비난을 받는 포지션이지만, 선수들은 그런 비판에 대해서 자유로워지길 바랍니다.
블레어 - 말씀하신 것처럼 리베로는 공격수와 달리 득점을 낼 수 없는 포지션이죠. 하지만 다른 플레이로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다음 수비나 리시브를 잘 받으면 당연히 좋죠. 또 상대 블로커의 숫자를 공격수들에게 콜 해주거나, 어택 커버 범위를 늘리는 것도 방법입니다. 큰 목소리를 내면서 동료들의 열정을 끌어올리는 것도 마찬가지죠. 득점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팀을 도울 수 있는 방식을 계속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Q. 그렇다면 지금까지 들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기준으로 봤을 때, 지금 대한항공의 리베로들은 어떤 것들을 잘하고 있고 어떤 것들이 보완됐으면 하는가요?
블레어 - 전반적으로 봤을 때는 불필요하게 넘어지는 횟수가 줄었습니다. 또 코트 안에서 큰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선수들이 됐습니다. 정성민 같은 경우 우리 팀의 리베로 중 가장 두려움이 없는 선수죠. 그게 그가 코트에 나설 수 있는 이유입니다. 다른 리베로들도 그런 모습을 본받길 원하고요.
부식 - (오)은렬이는 잘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슈퍼스타 아웃사이드 히터 듀오들에게 조금은 기가 눌린 느낌도 있습니다. 은렬이는 리베로잖아요. 리시브 라인을 주도하는 리더가 돼야 합니다. 언젠가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지만, 조금 더 그 시기가 빨라지길 바랄 뿐입니다.
블레어 사실 훈련 때는 선수들이 더 많은 것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실전에 들어가면 팬들도 있고, 중계도 되니까 훈련 때만큼을 보여주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또 우리는 투 리베로를 쓰는 팀이고 훈련 때도 리베로들을 강하게 압박하기 때문에 리베로들이 살아남기 어려운 팀입니다. 하지만 다들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Q. 대한항공의 리베로들은 물론 모든 리베로들과 팬들에게 교본이 될 법한, 리베로의 정석 같은 선수들을 추천해줄 수 있나요?
블레어 - 우선 브라질의 세르지우 두트라 산토스를 고르겠습니다. 세르지우의 플레이를 2004년에 중학생 때 처음 봤는데, 정말 경이로웠습니다. 2016년에는 직접 그를 상대해보기도 했죠. 경기에서는 졌지만, 그날의 기억이 생생해요. 그 때 세르지우는 42살이었는데도, 여전히 미쳤더라고요(Still going crazy). 그리고 현역 선수 중 프랑스의 제니아 그레베니코프를 꼽겠습니다. 누구보다 시끄럽게 소리 지르는 선수죠. 또 누구도 못 살릴 거라 생각한 공을 살리는 선수입니다. 현역 최고의 리베로라고 생각하고, 한계가 없는 선수라고 생각해요.
부식 - 저에게는 역시 (여)오현이죠. 경기에 임하는 태도도 좋고, 코트 안에서의 에너지와 리더십이 엄청난 선수입니다. 경기가 끝나면 너무 소리를 질러서 목이 쉴 정도였으니까요. 멘탈적으로도 꼭 필요한 약간의 뻔뻔함까지 갖춘 선수였습니다. 그야말로 리베로의 교본 같은 선수네요. 최근에 리그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는 선수들 중에서는 (박)경민이가 가장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않나 싶습니다.
Q. 끝으로 경기를 즐기는 팬들에게 리베로들의 이런 것들을 눈여겨보면 새로운 재미를 느낄 것 같다는 조언을 준다면요?
블레어 - 리베로는 공격을 하지 않기 때문에, 볼을 터치하지 않고 있는 순간도 많은 포지션입니다. 그 순간 동안 경기장을 뛰어다니면서 웃고, 또 옆에 있는 선수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터치와 하이파이브를 해주는 모습을 지켜보셔도 재밌으실 겁니다. 리베로를 신경 쓰지 않고 경기를 본다면 재미가 없으실 걸요(웃음)?
부식 - 공을 받기 전에 리베로가 어떤 동선을 가져가는지, 또 페이크 모션은 어떤 식으로 취하는지 같은 미세한 움직임들을 지켜보신다면 새로운 재미를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모든 순간들이 상대방과의 머리싸움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