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토커] '오타니 통역' 사건으로 본 메이저리그 통역의 세계

밤톨이 [카토커] '오타니 통역' 사건으로 본 메이저리그 통역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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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열린 MLB 월드투어 서울시리즈 2024는 다양한 국적과 언어가 뒤섞인 야구판 '바벨'과도 같았다. 영어권은 물론 한국, 일본, 대만에서 온 수많은 선수와 관계자, 취재진이 고척돔에 집결했다. 한국과 일본 선수는 개인 통역사를 대동했고, 그 외 감독과 선수들은 귀에 동시통역기를 차고 기자회견에 임했다. 오타니 쇼헤이의 결혼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무키 베츠와 프레디 프리먼은 "우리도 궁금하다"면서 통역기를 착용하려는 동작을 취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중 언어를 구사하는 박찬호는 통역 없이 등장해 한국어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박찬호는 30년 전 메이저리그 데뷔 당시의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빅리그에 아시아 선수는 박찬호 하나뿐이었고, 경기장에는 통역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첫 삼진구를 토미 라소다 감독으로부터 건네받았을 때 박찬호는 공이 갖는 의미를 즉각 이해하지 못했다. 불펜에서 대기할 땐 미리 한국어로 써둔 대형 큐카드로 의사소통했다.

이후 노모 히데오를 비롯해 일본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했고, 박찬호를 따라 빅리그에 도전하는 한국 선수들이 나오면서 통역은 빅리그의 새로운 직종으로 자리 잡았다. 2016년부터는 모든 MLB 팀이 최소 2명의 스페인어 통역사를 상근으로 고용하도록 의무화됐다. 2024년 현재 빅리그엔 총 12명의 일본어 통역과 2명의 한국어 통역이 일하고 있다.

오타니 통역사의 행각 "있을 수 있는 일"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한 통역 중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은 오타니 쇼헤이의 전 통역사 미즈하라 잇페이다. 슈퍼스타 오타니의 오른팔이자 분신으로 7년을 함께한 미즈하라는 인스타그램 팔로어만 수십만 명에 달하는 유명인사였다. 팬들에게 사인을 요청받고, 사인볼이 이베이에서 비싼 값에 거래되는 통역은 미즈하라가 유일했다. 서울시리즈 첫날 공식 기자회견 때는 오타니와 함께 등장해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 미즈하라는 통역계의 '흑역사'로 전락했다. 서울시리즈 1차전 다음날인 3월 21일, LA 다저스 구단은 돌연 미즈하라의 해고 소식을 알렸다. 드러난 진상은 충격적이었다. 미즈하라는 자신의 불법 스포츠 도박 빚을 갚으려고 오타니의 계좌에서 돈을 빼돌린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연방 검찰의 수사를 통해 미즈하라가 1만9000회 이상 베팅한 사실, 오타니의 계좌에서 1600만달러를 빼낸 사실이 드러났다. 심지어 통역의 지위를 이용해 오타니의 발언을 왜곡하고, 에이전트와 회계사가 오타니 계좌에 접근하지 못하게 방해한 정황도 나왔다. 미국 현지 매체에서는 미즈하라의 학력과 이력이 가짜라는 의혹까지 제기하고 있다.

사상 초유의 통역 스캔들에 전·현직 통역사들도 충격과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오승환의 메이저리그 시절 통역을 맡았던 구기환씨는 "안타까운 일이다. 통역과 선수는 가족이나 친구처럼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미즈하라의 행동은 친구를 배신한 것과 마찬가지"라며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국내 프로구단 통역을 맡았던 야구인 A씨도 "통역과 선수의 관계는 신뢰가 생명인데, 미즈하라가 한 일은 그 신뢰를 철저하게 무너뜨린 것"이라며 "같은 통역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럽다"고 말했다.

처음 사건이 불거졌을 당시 일각에선 '오타니도 불법 도박에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통역사가 선수의 돈을 제 주머니처럼 꺼내 썼다는 게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미즈하라의 통역 '장난질'로 초기 해명이 꼬인 것도 의혹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서재응의 메이저리그 시절 통역을 맡았던 다니엘 킴은 "선수의 개인적인 일까지 돕는 통역 업무 특성상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통역은 선수가 야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생활 모든 곳에 깊숙이 개입한다. 미즈하라는 과거 미국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말하기는 통역 업무의 10%에 불과하다"고 했다. 다니엘 킴은 "은행에 가거나 운전면허를 따러 갈 때도 통역이 동행한다. 집을 구할 때 부동산을 알아보는 일도 해봤다. 일본인 통역 중에는 원정경기 때 '벤토'를 미리 구입하는 것도 봤다"고 말했다.

구기환씨는 "미국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려면 사회보장번호가 필요한데, 여기에 필요한 서류를 만드는 일부터 필요한 업무를 통역이 함께하는 경우가 많다. 구단에서 개최하는 이벤트에도 선수와 함께 참석한다. 어느 자리에서든 선수의 눈과 입과 귀가 되어주는 게 통역의 역할"이라 말했다. 여러 KBO리그 구단에서 통역으로 일한 B씨는 "한국 생활이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 선수와 가족의 모든 일을 도와준다. 병원 진료 예약, 은행 업무 등도 도와준다"고 밝혔다.

'디애슬레틱' 기사에 따르면 아시아계 통역 중에는 선수 아내의 분만과 출산을 돕고, 의사로부터 선수에게 부상 소식을 전하는 중개자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선수 아내의 베이비 샤워를 도운 사례, 선수의 모국어를 모르는 마사지사를 위해 마사지하는 내내 옆에서 자리를 지킨 사례도 있다. 다니엘 킴은 "미즈하라는 오타니의 개인정보를 다 알고 있었고, 오타니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었다. 오타니의 주변 사람들도 미즈하라를 신뢰했다. 부정을 저지를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상태였던 셈"이라고 지적했다.

대우는 VIP, 대신 연중무휴 대기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직접 채용하는 스페인어 통역과 달리, 일본이나 한국어 통역은 선수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경우가 많다. 오타니와 미즈하라의 관계는 일본프로야구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시절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미즈하라의 허위 경력을 꼼꼼하게 점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김하성은 키움 히어로즈 시절 외국인 선수 통역이었던 레오 배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다. 지난해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한 외야수 요시다 마사타카는 오릭스 버팔로스 외국인 선수 통역 와카바야시 케이이치로에게 함께 가자고 요청했다.

다니엘 킴은 "통역 채용은 웬만하면 믿고 가는 경우가 많다. 통역의 특성상 구단 내에서 소속 부서나 업무 범위가 명확하지 않다. 선수가 옮기면 통역도 따라서 팀을 옮기는 식이다. 그렇다 보니 통역을 뽑을 때 일일이 백그라운드 체크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구기환씨는 "검증 절차가 있긴 하지만 선수나 에이전트가 강력하게 원하는 후보의 경우 최종 결정 단계에서 굉장히 유리하다. 메이저리그에서 뛸 정도면 다들 커리어가 대단한 선수들이라서 가능하면 본인이 함께하기 편한 사람을 통역으로 쓰기 원한다"고 전했다.

프로야구 선수의 분신이자 그림자 역할을 하는 만큼 통역사들은 선수들과 같은 혜택을 누린다. 비행기 일등석에 탑승하고 고급 호텔에 묵고 좋은 식사를 하며 구단에서 제공하는 각종 특전도 함께 제공받는다. 대신 워라밸이나 프라이버시와는 거리가 먼 삶을 감내해야 한다. 시즌 중에는 별도의 휴가나 병가가 없고 24시간 연중무휴로 대기한다.

디애슬레틱은 "통역은 아시아계 선수들에게 생명줄과도 같은 존재이며 그들에겐 잠자는 시간만이 유일한 휴식"이라고 전했다. 미즈하라와 오타니는 크리스마스에도 만나서 함께 운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즈하라는 "우리는 거의 매일 함께한다.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보다 더 오래 함께 있다"고 말했다. 다만 구기환씨는 "휴가는 비시즌 기간에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시즌 기간에 일하는 게 그렇게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고 했다.

다니엘 킴은 "선수가 미국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야구 외적인 업무가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일례로 다니엘 킴이 맡았던 서재응의 경우 미국 진출 초기엔 휴대폰 개통 같은 사소한 일도 전부 통역과 함께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여러 해를 보낸 뒤엔 웬만한 일은 통역을 부르지 않고 직접 해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니엘 킴은 "선수가 어떤 도시에서 뛰는지도 중요하다. LA나 뉴욕 같은 곳은 한국이나 마찬가지라 식당 찾기나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다. 하지만 한인이 적은 중소도시일 경우에는 통역의 도움이 없으면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 자주 생긴다"고 했다.

대기업 출신도 통역계로 진출 중

아시아계 선수의 미국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메이저리그에서 통역이 차지하는 비중도 점점 커지는 추세다. 통역 출신 A씨는 "야구계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에게 통역은 꼭 한번 도전해볼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구기환씨는 원래 광고계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우연한 계기로 오승환 에이전트사와 인연이 닿아 통역 일을 시작했고, 이후 맷 윌리엄스 KIA 감독 통역을 거쳐 현재도 야구계에서 일하고 있다. 구씨는 "통역 일을 통해 야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고 야구의 비즈니스적인 면도 접할 기회가 생긴다. 야구계에 진입하는 사람에겐 꽤 괜찮은 일"이라고 말했다.

과거 류현진의 통역사였던 브라이언 리(이종민)는 현재 토론토 블루제이스에 남아 정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LA 다저스 시절 류현진의 통역을 맡았던 마틴 킴도 프런트를 거쳐 현재는 게임업체에서 활약하는 중이다. 한 야구 관계자는 "올해부터 김하성의 통역을 맡은 데이비드 리도 LG 출신 재원으로 알고 있다. 점점 통역계에도 재능 있는 인재들이 유입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여러 구단에서 통역으로 일한 B씨는 "통역은 추천할 만한 직업이지만, 대신 통역 직무 외에 다른 계획을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한다. 선수의 말을 전달하는 역할에 스스로를 한정하면 다음 기회는 없다. 야구계에서 오래 일하기 위한 자신만의 플랜이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자기 지위를 이용해 사익을 추구한 미즈하라는 통역사들의 세계에서 예외적인 케이스다. A씨는 "원하는 게 돈이나 명성이라면 야구단 통역이 아닌 다른 일을 찾는 편이 낫다. 대부분의 통역은 야구를 좋아하고, 선수가 진심으로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생활도 반납해가며 일한다"고 했다.

구기환씨는 지금도 오승환과 함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스프링캠프를 처음 방문한 날을 잊지 못한다. 그는 "선수 본인도 물론 설레고 기대했지만, 나 역시 처음 보는 광경에 얼마나 떨렸는지 모른다"고 했다. 구씨는 오승환이 부상으로 한국에 돌아왔을 때도 모든 일정을 함께했다. 선수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함께하고, 선수의 기쁨과 슬픔을 자신의 것처럼 나누는 상대. 그게 바로 통역의 역할이다. "외국에서의 생활은 외롭지 않나. 선수에겐 믿고 속마음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가까이에 있는 게 중요하다. 편하게 이야기할 상대가 아무도 없다면 선수는 힘이 빠질 거다. 그런 점에서 친구처럼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족처럼 보살피는 존재, 그게 바로 이상적인 통역과 선수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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