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토커] 낭만 가득했던 젊음을 품고… ‘배구 레전드’ 장윤창이 꿈꾸는 인생 ‘제3막’

[카토커] 낭만 가득했던 젊음을 품고… ‘배구 레전드’ 장윤창이 꿈꾸는 인생 ‘제3막’

촐싹녀 0 104

 


‘돌고래 스파이커’ 장윤창(64)은 1980년대 한국 남자배구 코트를 휘저은 살아있는 전설이다. 학창 시절부터 심상치 않은 능력을 수놓던 그는 18세라는 어린 나이부터 태극마크를 달아 굵직한 이정표를 세우며 남자배구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함께 영광의 시대를 보낸 동료들은 여전히 지도자로 코트를 누비지만, 장윤창은 조금 다르다. 자신의 모교인 경기대학교에서 체육학과 교수로 후학 양성에 모든 열과 성을 쏟는 중이다.

◆낭만을 간직하고

‘돌고래 서브’는 장윤창을 상징하는 수식어다. 지금은 당연한 개념이 된 스파이크 서브를 한국 최초로 시도한 선수가 바로 그였다. 강력한 서브를 위해 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돌고래를 연상시키기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 그가 일으킨 신드롬이 남자배구 붐을 일으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트렌드의 선구자로서 아시안게임 금메달 2회, 은메달 2회, 세계선수권 4강 진출 등 숱한 영예의 순간도 누렸다. 하지만 그가 꼽은 가장 찬란했던 순간은 다른 곳에 있었다. 장 교수는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아시아 예선, 한일전”을 언급했다. “한국 배구 역사상 일본을 처음으로 이긴 경기”였기 때문이다.

그는 “1979년 12월로 기억한다. 당시 일본은 1972 뮌헨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는 등 세계적인 레벨에 올라있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를 한 수 아래로 보는 것도 있었다. 한국에 배구를 들여온 건 미국이지만, 사실상 발전된 건 일본에 의해서였다. 우리에게 질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던 이유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어 “0-2로 지던 경기를 3-2로 역전했다. 정말 감격스러웠고, 짜릿했다. 넘을 수 없는 벽을 허물었다는 게 너무나도 기뻤다”며 “그다음부터는 두려운 것도, 겁도 없었다. LA 올림픽 전까지 상대 12연승을 달렸을 정도”라고 웃었다. 



◆미지의 길에 서서

실업팀 고려증권에서 선수 생활을 하던 그는 1994년 정든 코트를 떠났다.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했던 시점, 그의 선택은 일반적인 레전드들이 선택하는 지도자가 아닌 ‘공부’였다. 그는 “1994년 말에 미국 유학을 떠났다. 고등학교 2학년부터 국가대표를 했다 보니 인생에서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늘 갈증이 있었다”는 배경을 밝혔다. 마침 은퇴가 가까워지던 시점, 모교인 경기대에서 교수의 길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에 마땅한 커리어를 쌓고자 머나먼 미국으로 떠났다.

지도자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는 이유도 있었다. 그는 “1988년쯤 동기들은 이미 다 은퇴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부터 팀에서 플레잉 코치로 7년가량을 더 뛰었다. 그때 선수들을 지도해본 경험이 있다. 그 시간을 겪었기에 내 길은 공부가 더 맞겠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렇게 미지의 땅으로 향해 스포츠 매니지먼트, 스포츠 마케팅, 체육학, 경영학 등 체육과 관련된 체계적인 논리와 이론들을 섭렵할 수 있었다. 영어 한 줄 제대로 할 수 없던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더 많은 열정을 쏟았다. 그는 “정말 힘들었다. 선수 생활 할 때는 코피를 흘려본 적이 없는데, 미국 가서 수도 없이 쏟았다. 잠도 안 자고 책을 봤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2003년 경기대 체육학과 교수로 정식 부임할 수 있었다.

그는 “화려했던 선수 시절에 비하면, 교수 부임 초기 수입은 턱없이 모자라긴 했다. 가족들에게는 미안한 부분이었지만, 공부를 시작한 순간 내려놓을 수 없는 사명감들이 있었다”며 “한국 체육 전반에 걸쳐 변화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선수들이 더 나은 환경 속에서 운동할 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 체육계 전반에 정책적 변화를 시도했던 이유”라고 힘줘 말했다. 


◆아름다운 엔딩을 향해

후학 양성을 위해 힘써온 지 어느새 20년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교수’ 장윤창으로서의 열정은 여전하다.

그는 “가야 할 길이 아직 멀다. 선수들을 운동 기계로만 키우면 안된다는 소신을 여전히 갖고 있다. 기계는 결국 녹슬기 마련이다. 선수들을 그렇게만 육성시켜서는 대한민국 체육계 전체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이어 “우리가 프로에서 보는 선수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경쟁에서 도태된 나머지 선수들은 운동만 바라보다가 인생이 무너지기도 한다. 이들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인도해 주는 길라잡이, 안전장치가 있어야 한다”며 “출산율마저 감소하는 시대에 누가 성공 확률 낮은 운동을 시키려 하겠나. 미국, 일본처럼 생활로 스며드는 체육에 대한 고민과 지도자들의 인식 개선이 필요한 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 체육계를 향한 변함없는 애정과 함께 교수로서의 아름답고 소박한 엔딩을 꿈꾼다. 그는 “교수 정년 퇴임이 2026년 2월쯤이다. 이제 1년 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 이후는 어쩌면 ‘제3의 인생’이 되겠다”며 “힘이 닿는 데까지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고 싶다. 마지막까지도 제자들이 허물없이 연구실을 드나들 수 있는,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는 교수로 남고 싶다”고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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