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맞아 죽은 환관과 태조의 기상을 지닌 아이
벼락이 내리쳐 환관 백충신이 죽은 이야기를 전해...
이를 자신틔 탓으로 돌리며...
"하늘의 꾸짖음을 만나 공구함이 진실로 깊으니, 거의 군신과 백성이 도움에 힘입으면, 재앙을 소멸하고 복을 맞아서 길이 근심 없음을 보전할 것이다"라고 하시고
죄수들을 방면하고
관리들을 하여금 시정의 폐단을 올리도록 하는 조치를 하였지...
* 하필 명나라 사신이 와있을 떄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데... 세조는 이 일이 외국에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명나라 사신단에게 이 이야기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 또한 취함
한편 세조는 이 내관이 벼락 맞아 죽은 사건과 관련하여
자신의 손자를 칭찬하기도 하는데...
어린 환관이 벼락을 맞아 죽는 와중에도
자을산군이 그 장면을 보면서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침착하게 행동하였던 것으로
그는 이 어린 손자를 가리켜 '태조의 기상'을 가진 아이로 칭찬하였다고 해
* 자을산군은 훗날 왕이되며... 성종의 묘효를 받는데...
* 현대 사극에서 그려지는 인수대비의 이미지와 강성했던 훈구대신들, 극성맞은 사림파 간관들 때문에 성종은 유약한 이미지가 있기도 하지만... 개인으로서의 성종은 사냥을 굉장히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와는 좀 다른 모습이 있었음
* 물론 위의 세조의 칭찬은 성종의 등극을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기는 한데... 세조는 자기 신하들도 장량, 소하 등에 갖다 붙히는 걸 잘 하던 인물이기에... 칭찬 자체는 사실이더라도.. 월산대군의 행동은 세종을 닮았다 식의 칭찬 또한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성종의 즉위로 인해 세조의 칭찬이 특별히 취사선택 되어 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지...
* 참고로 월산대군 또한 환관이 벼락 맞아 죽는 자리에 동생과 같이 있었는데... 아마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경악하여 뒤로 넘어가지 않았나 싶음
* 월산대군도 장점이 많은 인물이었지만... 세조의 성격상 아무래도 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짝 안하는 자을산군이 더 마음에 들었을 가능성은 있을 듯...
* 글을 마칩니다.
*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