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들의 신대륙에서 저지른 학살
아모르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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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12:51
개요
'프런티어 제노사이드(Frontier genocide)'런 유럽인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식민지를 개척하는 중에 발생한 제노사이드를 일컫는다.
그렇다고 식민지에서 일어난 모든 제노사이드를 프런티어 제노사이드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식민지 모국이 식민지를 산업 발전에 필요한 원료를 공급해주는 곳, 상품을 소비해주는 곳, 자본을 투자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판단한 경우에는 전형적인 의미의 제노사이드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용한 식민지에서 제노사이드가 일어났다면 그것은 정치적, 군사적 목적의 제노사이드 일것이다.
프런티어 제노사이드의 3단계
영토 침탈 과정에서 일어난 프런티어 제노사이드는 대개 3단계로 진행 되었다.
첫번째 단계는 유럽 출신의 식민지 개척자들의 침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초기의 탐험 과정이 끝나고 개척자들의 본격적인 정착이 이루어지면서, 제한된 자연 자원들을 놓고 백인 정착민과 원주민 사이에 지속되던 갈등은 충돌로 바뀌어갔다.
백인 정착민은 원주민을 동등한 이웃으로 역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권리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백인들의 문화적 편견과 인종주의가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두번째 단계는 생산기술이나 무기면에서 백인들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던 원주민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항에 나서면서 시작되었다.
생활 터전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과 인내할 수 없을 정도의 모욕적인 대우만 아니었다면 원주민들의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식민지 정부는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던 백인 정착민들의 강력한 요구를 받아들여, 원주민들과 백인들이 물리적으로 충돌할 소지를 근본적으로 없애기 위해 원주민 절멸 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백인 식민지 정부가 대대적인 절멸 작전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원주민들을 '보호 구역'이라고 명명된 수용소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러나 이름과는 다르게, 이 구역에 수용된 원주민들은 인간에게는 물론 자연에게도 보호받지 못했다.
제대로된 의복과 식량, 의료술은 공급되지 못했다.
과로와 백인 정착민들의 상습적 폭력도 원주민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 결과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 원주민들 사이에서 사망자가 급속하게 늘어났다.
식민지 정부는 이들의 죽음이 자연사라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초래한 죽음,
즉, 살인이었다.
보호 구역에서 일어난 원주민들의 집단적 죽음은 백인 식민지 정부의 제노사이드 정책에 따른 간접 학살이었다.
북아메리카에서의 원주민 학살(17~19세기)
"누워서 골짜기를 내려다 보고 있는데, 많은 여인들이 울면서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이 여인들과 소녀들, 그리고 어린 여자 아이들이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계곡 양쪽에서 이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사격하는 군인들이 보였다."
이것은 미군이 부상당한 수족(sioux) 원주민들에게 저지른 학살에 관한 증언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지 채 몇십 년도 지나지 않아서 카리브 해 일대의 원주민들이 절멸되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은 신세계의 발견을 이야기하고, 그곳에 살도 있던 원주민들의 '문명화'에 대해 말했지만, 유럽의 탐험가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가지고 온 문명의 보따리 속에는 넣어 오지 말았어야 할 구세계의 유산들이 잔뜩 담겨 있었다.
인간에 대한 편견과 증오, 악마와 같은 잔임함, 왜곡된 인간성, 살인의 쾌락이 바로 그것이었다.
인종 전쟁
1607년 영국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정착을 위해 오늘날의 미국 버지니아 지역에 도착했을 떄,
그곳에는 이미 1500만명이 넘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개척자들은 그곳을 임자 있는 땅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버지니아를 비롯한 북아메리카의 모든 땅이 비어있는 땅으로만 보였다.
영국인들이 정착한 지 채 100년도 되지 않아 버지니아의 포와타 부족 연맹의 인구 수는 3000명 정도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인디언 전쟁에서 수많은 원주민들이 학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은 가는 곳마다 '청소한 뒤에 정착하는' 전략을 철저하게 구사했다.
상업에 주력했던 프랑스인들은 영국인들과는 사뭇 다른 전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똑같은 결과를 낳았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했으나 영국인들이 원주민들을 학살하며 영토를 확장함에 따라 경쟁심을 느낀 프랑스인들도 원주민 학살에 가담하기 시작한 것이다.
1649년에 오대호 부근에 살고 있던 휴린 부족이 거의 절멸된 것도 이 과정에서 일어난 참사였다.
스페인인들의 식민지 개척 양식은 또 달랐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원주민들을 기독교도로 개종시키는데 관심을 두고 있었고, 이 목적을 위해서는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들이 의도한 개종은 우리가 생각하는 개종과는 크게 달랐다.
개종을 통해 '기독교인'이 된 원주민들은 스페인 군대의 강압에 못이겨 교회 주변에 모여 살면서 스펭니 정착민들의 노예가 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짧은 원정 기간임에도 지금의 뉴욕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라리탄 부족을 비롯해 몇 개의 원주민 부족을 섬멸해버렸다.
이들은 원주민을 절멸하는 데 '보조금 지급 제도'라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1641년 네덜란드의 식민지 정부 '니우네-데를란트'의 총독 빌렘 키프트Willem Kieft가 도입한 이 제도는 성별, 나이에 관계없이 원주민의 머리 가죽을 벗겨 오는 사람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으로서, 엄청난 원주민 살상을 불러왔다.
영국인들도 이 제도를 곧바로 도입했다.
영국인들은 이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더욱더 '세련된'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영국인들은 성인 남성의 머리 가죽에 가장 많은 보상금을 걸었고, 성인 여성의 것에는 그보다 적은 것을 걸었다.
어린이들 또한 성인 만큼은 아니지만 어느정도의 돈은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원칙이 오랫동안의 교육을 통해 사람들 마음속에 심성처럼 자리 잡았고, 지급되는 보조금 액수가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기 때문에, 1600년대 말에 와서는 직업적인 '인디언 사냥꾼'까지 다수 출현하게 되었다.
독립 이후의 제노사이드
독립 전쟁이 끝나고 영국 군대가 물러간 뒤에도 북아메리카에서는 원주민 학살이 끝나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식민지 시절의 보조금 지급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모든 주에서 시행했다.
또 인디언을 절멸하기 위해 영국인들이 고안해낸 '생물학적 전쟁'의 방법도 독립전쟁 이후에 드대로 동원 되었다.
생물학적 전쟁이 처음 도입된 것은 1763년이었다.
바로 이 해에 제프리 애머스트Jeffrey Amherst 경은 '저주받은 인종'을 괴멸하기 위해 천연두에 감염된 물건들을 오타와 부족에게 나눠줄 것을 지시했다.
그 결과 오하이오 강을 따라 퍼진 전염병 떄문에 최소한 10만명 이상의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독립 이후의 정부도 이 생물학적 전술을 사용하였고 미저리 주에서는 십만 단위의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눈물의 길
1830년대 초 미국은 미시시피 강 동쪽 지역에 살고있던 모든 원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 시키는 정책을 수립했다.
이 계획에 따라 구금 되었던 원주민들은 백인들의 감시와 통제 속에 수천 마일에 이르는 행진에 나서야 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원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체로키 인디언들이 치러야 했던 눈물의 길Trail of Tears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1837년 봄부터 1838년 가을까지 1만 6000명의 체로키 인디언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오클라호마까지 걸어가야했다.
이 '행진'은 9개주에 걸쳐 1800마일을 걸어가야 하는 대장정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는 200일이 걸렸다.
쏟아지는 비, 추위, 질병, 기아, 정신적 고통 속에서 4000명의 인디언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 정부의 '인디언 전쟁'
40여 차례에 걸쳐 일어난 기묘한 성격의 '인디언 전쟁'더 아메리카 인디언이 절멸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19세기 내내 이루어진 이 전쟁들은 이름만 '전쟁'이지 학살에 가까웠다.
인디언 학살은 직접적인 방식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방식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버팔로 사냥이었다.
원주민의 생계수단인 버팔로를 멸종시킴으로서 인디언들의 삶의 기반을 붕괴시킨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 절멸 정책을 통해, 최대치로 추산할 경우, 1500년경 1500만명에 이르렀던 북아메리카 인디언은 1890년에는 25만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97.5퍼센트가 사라져버린것이다.
남은 구성원들은 그 수가 너무 적어 자신들의 말도 전통도 후세에 물려주지 못했고 수많은 원주민 문화가 없어졌다.
원주민 학살의 심성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지난날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원주민들을 절멸시킨 백인들 가운데 특별히 악하거나 나쁜 양심을 가진 사람은 드물었다.
식민지 시절이나 독립 이후에 북아메리카에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제노사이드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오늘날 그들의 행동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보통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오늘날의 미국인들에 비해 훨씬 열심히 성경을 읽고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하나님의 집을 찾는 '선량한' 시민들이었다.
그렇다면 그 백인들 속에 있는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살인으로 몰아갔을까?
가장 결정적인 동기는 물론 땅이었다.
그러나 경제적 동기만으로 대대적인 학살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학살은 학살의 심성이 개인과 사회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곳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오늘날 평범한 백인들이 피부색이나 문화의 차이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을 자신과 똑같은 인간으로 봐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데 반해
골짜기와 평원에서 원주민들이 죽어가던 그 시절에는 인종주의가 백인들의 사고를 전면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원주민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폄하하는 논리가 북아메리카 백인들의 심성을 지배하고, 그렇게 일그러진 심성이 생존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경제적 동기와 직접적으로 결합되었을 때 제노사이드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원주민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인'이나 '야만인'으로, 더 나아가 혐오스러운 동물이나 곤충, 심지어 벼룩으로 까지 묘사해 완전히 타자화 했을 때, 진보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인디언이라는 종의 절멸이 하느님과 자연이 정해놓은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고가 확신으로 탈바꿈 했을 때, 제노사이드는 바로 보통 사람들의 손으로 자행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