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의 개념에 대해
아모르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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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12:51
1. 제노사이드의 어원
1941년 8월 24일 영국의 수상 처칠이 BBC 방송을 통해
독일 정규군과 살인특무부대들이 소련 지역에서 저지르고 있던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을 "이름 없는 범죄"라고 부르며 성토하고 있을 때
미국 땅에서는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법학자 한 명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온 가족을 폴란드 땅에 남겨둔 채 홀로 탈출에 성공한 렘킨은
중립국 스웨덴에 잠시 머물다가 1941년 4월에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로부터 3년 반이 지난 뒤인 1944년 11월
그는 《점령된 유럽에서의 추축국 통치(Axis Rule in Occupied Europe)》라는
두툼한 책을 출간했다.
바로 이책서 "이름 없는 범죄"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엄청난 규모의 인종 학살에
'제노사이드'라는 생소한 이름을 부여했다.
제노사이드라는 말은 인종이나 종족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genos에 살인을 의미하는 라틴어 cide를 결합하여 만든 합성어로, 렘킨은 이말을 통해 "한 국민이나 한 민족 집단에 대한 파괴"를 개념화하고자 했다.
렘킨이 보기에,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집단 학살'이라는 용어는 나치 독일이 저지른
국가 범죄를 설명하기에는 매우 부정확 한 말이었다.
집단 학살은 렘킨이 제노사이드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려 한 현상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2. 제노사이드의 기술
렘킨은 자신의 저서 《점령된 유럽에서의 추축국 통치》의 제 9장
'제노사이드'라는 소제목이 붙은 이 장에서 제노사이드가 반드시 한 민족에 대한
즉각적, 물리적 파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제노사이드는 "어떤 집단을 절멸할 목적에서 그 집단 구성원들의
생활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토대들을 파괴하기 위해 기도되는 다양한 행위들로
이루어진 공조 가능한 계획"을 뜻한다.
이 계획의 목표는 "한 집단의 정치 제도와 사회 제도, 문화, 언어, 민족 감정, 종교, 경제적 생존 기반을 해체하고
개인적 안전, 자유, 건강, 존엄성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 집단에 속한 개인들의
생명까지 파괴" 하는 데에 있다.
제노사이드를 이렇게 규정할 경우, 우리는 한 집단의 구성원 전체에 대해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물리적 절멸을 시도하는 강경한 사례들을 포함하면서도,
그 집단의 존재 기반 자체를 서서히 와해 시키는 '부드러운' 절멸의 사례도 놓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렘킨은 나치 독일의 사례에 근거해서 다음과 같이 여덟 개 분야로 나누어 제시했다.
1. 정치: 창씨 개명, 모든 정당의 해산, 자국민의 점령 이주
2. 사회: 저항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지식인들과 성직자 제거, 점령국의 법 체계 이식
3. 문화: 모국어 사용금지, 초등 교육과 직업 교육에 바탕을 둔 우민화 정책, 자국민 교살르 통해 점령국의 이데올로기를 주입, 일체의 문화 통제, 민족적 전통을 상기시키는 모든 기념비의 파괴와 문화기관 폐쇄
4. 경제: 경제적 생존의 토대를 파괴하기 위해 토지와 기업 몰수, 일체의 상업 활동 금지, 은행 장악
5. 종교: 민족 정신을 함양하는 종교 기관 탄압, 성직자 제거, 청소년들에게 점령국의 대체 종교 보급
6. 도덕: 포르노 책자와 영화 유포, 주류의 염가 보급, 도박 시설 조성
7. 물리: 식량 배급상의 차별, 의복-담요-난방 염료-의약품 공급의 엄격한 제한, 게토와 강제 수용소 건설을 통해 거주 이전의 자유 박탈, 강제 이송과 집단 학살
8. 생물: 혼인 허가제 도입, 노동 능력과 생식 능력을 갖고 잇는 남성들의 타 지역 강제 이송, 강제 불임 수술 시행
3. 렘킨의 1인 십자군 운동
《점령된 유럽에서의 추축국 통치》를 통해 미국 학계와 일반인들의 주목을 끄는 데 성공한 렘킨은
대통령과 부통령을 비롯한 고위 정책 입안자들을 직접 설득하는 한편, 언론 기고를 통해 여론을 환기하는데 힘썼다.
그는 나치 독일이 저지른 것과 같은 엄청난 만행을 예방하기 위해 무엇보다 제노사이드를 국제법상의 범죄로 규정하고, 각국이 국내 형법을 통해 그 내용을 재확인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정치인들로 하여금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여론을 움직여야 했고, 여론을 움직이려면 미국이 왜
제노사이드를 방관해서는 안 되는지 납득시킬 논리가 필요했다.
렘킨은 제노사이드가 국제적인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제노사이드를 용인하면 인종적 우월성을 내세워 다른 국가를 침략하는 일이 끊이지 않을 것
둘째, 소수 집단에 대한 탄압을 용인하면, 국가의 도덕적 기반이 붕괴 될 수 있음.
셋째, 나치 독일이 저질렀던 재산 몰수를 용인하면, 자유무역의 토대도 붕괴됨
넷째, 소수집단을 강제로 추방하면 이웃 나라들과의 분쟁을 피할 수 없게 됨
다섯째, 인류의 문화는 여러 민족들의 공헌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한민족의 절멸은 그 민족만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는다.
렘킨의 노력은 전쟁 종식과 더불어 시작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부분적 결실을 보았다.
비록 재판부가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검사의 기소장에 '제노사이드'라는 단어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4. 국제 사회의 호응
렘킨의 노력은 1946년 후반에 가서야 결실을 보았다.
1946년 10월 석세스 호수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 미국 대표단의 강력한 후원과 쿠바, 인도, 파나마 대표단의 전폭적 지지에 힘입어 렘킨의 주장이 주요 의제로 상정된 것이다.
11월 22일 열린 총회에서는 영국의 법무장관 허틀리 쇼크로스Hartley Shawcross 경은 지난날 제노사이드에 관한 제안을 즉각적으로 수용하지 않은 탓에 나치 전범 재판에서도 심각한 범죄들 가운데 일부를 처벌할 수 없었다는 점을 환기시키며, 회원국 대표들에게 초안의 원안 통과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로써, 절멸의 위협에 몰린 소수 집단을 구하기 위해 국제 사회가 개입할 수 있는 근거가 처음으로 마련되었다.
제노사이드 결의안의 채택은 렘킨이 펼쳤던 1인 십자군 운동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 제노사이드 협약의 성립 과정
1948년 파리 유엔 총회
1948년 12월 9일 파리에서 열린 유엔 총회는 1946년의 제노사이드 결의안을 바탕으로
모두 19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제노사이드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을 92개국이 채결하는 데 성공했다.
제노사이드 협약 2조는 제노사이드를
"국민-인종-민족-종교 집단 전체 또는 부분을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실행된 행위"로 규정했다.
그리고 1948년 12월 9일 총회에서 최종안이 채택되기까지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와 주요 회원국들의 역사적 경험, 그리고 법논리가 서로 충돌하고 타협하는 논쟁의 시간이었다.
5.1 보호 집단의 규정
제노사이드 협약이 어떤 집단을 보호할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여기서 마지막까지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정치 집단을 이 협약이 보호하는 집단에 포함할 것인지의 여부였다.
1946년 결의안에서는 '인종-종교-정치 집단과 그 밖의 집단'이 보호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1948년 봄에 구성된 전문 위원회에서 소련 대표는 정치 집단의 배제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폴란드와 이란을 비롯한 여러 나라도 소련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들은 정치 집단이 다른 집단들과는 달리 항구성과 불가피성을 결여하고 있는데다가,
구성원들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 쉽게 구성될 수도 있고 해체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가변성을 너무 많이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 대표는 소련이 인종주의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기치로 내걸었던 나치즘의 사례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제노사이드 협약은 나치즘 등장 이전에 발생헀던 제노사이드 사례들은 물론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새로운 양상의 제노사이드들까지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정치 집단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플아스의 주장에 볼리비아, 아이티, 쿠바 대표가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소련은 제노사이드 협약으로 인해 스탈린 치하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정치적 학살이 국제 사회에서 쟁점으로 부각되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 밖의 다른 여러 나라들도 감추고 싶은 과거가 국제 법정에서 다루어지는 것을 용납하려하지 않았다.
결국 정치 집단은 제노사이드 협약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정치 집단은 제노사이드가 아닌 유엔 인권 위원회 소관으로 보호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5.2 제노사이드의 범위
렘킨은 본래 제노사이드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도덕, 물리 생물이라는 여덟 개 분야에서 일어나는 다면적 현상으로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도 의견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문화적 제노사이드의 포함 여부를 놓고 벌어진 논쟁에서는,
정치 집단을 협약의 보호 대상에 포함 시킬 것인지에 대한 논쟁에서와는 달리,
소련을 위시한 동유럽 국가들이 문화적 제노사이드를 포함시킬 것을 주장한데 반해
서유럽 국가들은 배제를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문화적 제노사이드와 관련된 내용은 과거에 식민지 모국으로서 점령지역의 문화적 전통 파괴와 문화 유산 수탈에 앞장섰던 서유럽 국가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거의 삭제 되고 말았다.
6. 제노사이드의 결과적 정의
제노사이드에 대한 논의는 현재까지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여러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자면
제노사이드 전문가인 이즈리얼 차니Isreal Charny 박사는 제노사이드란
"희생자들이 본질적으로 방어 능력이 없고 무력한 조건 속에 있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상당수의 사람들에 대한 집단 학살"이라고 총괄적인 방식으로 정의했다.